ADVERTISEMENT

도둑놈 X씨 오택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9년 전 당시「닉슨」미대통령이 대수롭지 않은 일로 설와를 입은 적이 있다. 여우「셰련·테이트」양의 살해혐의로 재판에 계류 중이던 「찰즈·맨슨」을 가리켜<선고받은 살인자>(convicted murderer)란 극언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법과 질서의 기치를 내걸고 재선을노리던 「닉슨」에겐 「맨슨」이야말로 적시출현한 공격목표이자 자신의 사회정의관을 유권자에게 알릴 수 있는 쭝은 홍보소재라 느꼈던 것 같다.
예상대로 언론은 「닉슨」의 발언을 연일 대서특필했고 「맨슨」도 일약 스타로 군림하게 됐다.
그러나 전혀 예기치 못한 사실은 미국민의 반응이 의의로 냉담했던 점이다. 강간·살인과 같은 강력사건이 발생하면 언론이 먼저 흥분, 사건을 선정적으로 다루게 되고 용의자의 유·무죄까지도 따지러 드는 소위 언론재판도 이따금 보게된다.
구미 사법제도의 특징은 이러한 언론의 횡포(?)를 용납치 않는데 있다. 재판판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내용은 비록 사실일지라도 게재하지 않고, 이러한 수칙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 오번판결도 불사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무기형을 살던 산부인과의 「셰퍼드」박사가 복역 10여년만에 오번판결로 풀려 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국민들이 「닉슨」발언에 반발한 것은 「맨슨」사건이 「셰퍼드」캐이스의 재판이 될 것을 우려했던 까닭이다.
최근 윤노파 살인사건, 박상은양 살해사건을 에워싸고 경찰의 수사과정과 언론의 보도자세가 문제화되고 있다. 기소된 고여인은 고문에 의한 자백임을 내세워 무죄를 항변하고 있고, 풀려난 J군은 언론보도에 노골적인 불만을 토로했다.
국민 여론을 간파한 경찰당국은 피의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치안본부에 인권과를 신설하리라한다.
우리 언론은 벌써 10여년 전부터 성년피의자에게 존칭으로 씨자를 붙여주는 전통이 서 있다. 인권보호를 위한 적극적 노력이라는 자찬도 나왔다. 인격을 보호하고 명예를 존중하자는데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 방법이 문제인 것이다.
기사의 내용을 보면 틀림없는 살인범, 사기한, 반사회적 인물인데 바로 그 이름 석자 뒤에 씨자가 뒤따르니 어의상의 혼돈을 갖게된다. 병주고 약주는 논리상의 모순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만약 윤노파. 박양사건이 구미사회에서 발생했다면 그 나라 언론은 이를 과연 어떻게 취급했을까 생각해본다. 미·영에선 언론-경찰-사법 삼자간의 자발적 합의에 따라 재판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실은 보도하지 않는 지침(Press-Bar-Bench Gudeline)이 서있다.
용의자의 전과사실이나 자백내용, 인품 및 성격, 거짓말탐지기나 탄도측정기에 의한 시험결과 목격자의 진술 등은 신문에 싣지 않는 자제력을 발의한다. 피의자의권익을 보호하는 적극적 제도라 생각된다. 인격살상을 당한 「억울한」피의자 입장에선 존칭의 부여가 아무런 위안이 될 수 없다.
10명의 죄인을 놓칠망정 무고한 한사람을 희생시킬 수 없다는 사법의 기본정신은 강력사건을 보도하는 언론에도 적합한 신조가 될 것 같다.
선정적인 보도로써 만명의 독자를 즐겁게(?) 하기 보다는 죄없는 한 사람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혀서는 안되겠다.
고대교수(신문방송학) ▲41년 서울출생 ▲미 인디애나대 매스컴학 박사 ▲미 버지니아커먼웰즈대 신방과 교수 ▲중앙일보 이사 ▲저서 『탤리비전교재평가방법론』(영문)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