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은은한 청화백자 … 장바닥 같은 전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4면

조선 전기 왕실 전유물이던 청화백자는 시간이 흐르면서 일반 백성도 즐겨 쓰는 그릇이 됐다. [신인섭 기자]

많이도 모았다. ‘최초, 최대 규모’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하다. 지난달 30일 서울 서빙고로 국립중앙박물관(이하 국박) 기획전시실에서 막을 올린 ‘조선청화(靑畵), 푸른빛에 물들다’는 우선 물량으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국보와 보물 10점을 포함해 500여 점이 깔렸는데 이중 150여 점은 국박 수장고에서 일제강점기 이후 한 번도 밖에 나오지 않았던 청화백자라고 한다. 국박으로서는 회심의 전시라 할 수 있다.

 청백색 살결이 은은한 도자기들이 가을 들녘처럼 풍성하니 장관인데, 장바닥처럼 늘어놓기만 해 어수선하다. 조선청화백자의 특징을 드러내기 위해 국내외 박물관에서 빌려온 중국과 일본 청화백자도 나란히 전시하고있는 점 이외에 차이점을 알기 어려웠다. 전시 끝머리 제5부에 마련한 ‘현대에 살아 숨 쉬는 청화백자의 미감’은 조선청화백자의 전통을 현대에 계승했다는 그림과 현대 공예 등을 엮었는데 ‘자의적 끼워 맞추기’라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었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 코너는 제4부 ‘청화백자, 만민(萬民)의 그릇이 되다’였다. 조선 전기 왕실의 전유물이던 청화백자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 생산량이 크게 늘면서 그 향유층이 일반 백성으로까지 확대됐다는 것이 요지다. 안료 수입량이 증가하고, 조선 사회계층이 변화했으며, 장수와 복을 기원하는 민화의 도상이 청화 문양으로 표현되었다는 설명이지만 설득력이 약했다.

 지난 1일 ‘청화백자, 청렴결백의 그릇’이란 주제로 학술강연한 방병선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한·중·일 삼국 청화백자의 비교면 비교, 사대부의 미감이면 미감, 제작 과정이면 과정, 핵심을 짚어 그 주제에 집중하는 전시였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혜곡 최순우(1916~84) 전 관장이 조선 청화백자를 두고 한 말, “중국 것처럼 거만스럽지도 수다스럽지도 않으며, 일본 것처럼 경묘하거나 잔재주를 부리지도 않아서 우선 병 모양만 가지고도 한국이라는 국적을 분명히 해 주는, 의젓하고도 속이 트인 아름다움”을 전시기획은 드러내지 못하고 말았다.

 전시는 11월 16일까지. 02-1688-2046 .

글=정재숙 문화전문기자
사진=신인섭 기자

◆조선 청화백자=초벌구이한 백자에 코발트 안료를 사용해 장식한 후 백자 유약을 발라 구운 그릇. 9세기 이란 지역에서 기원해 14세기 중국 원대에 형식이 완성되었다. 조선은 15세기경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제작기술을 획득한 뒤 왕실 주도의 관요(官窯) 체제를 유지하며 왕족과 사대부, 부유층이 누리는 문화로 자리 잡았다. 장식 도안이 세련된 중국 것에 비해 문인화풍 회화가 조촐한 맛을 풍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