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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20년 서울 미 문화원 점거 73인은 지금] '인재 농사' 짓고 … 의료 봉사 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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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문화원 점거 농성을 벌였던 주역 13명과 그들의 가족이 21일 밤 신정훈 나주시장의 집 앞뜰에 모여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부르며 20년 전을 떠올렸다. 반주는 광주시립교향악단의 비올라 연주자가 자청해 맡았다. 광주=양광삼 기자

"변혁의 꿈은 안단테로…."

독일 낭만파 작곡가 슈만의 '꿈'이 비올라 선율에 실려 울려퍼지자 신정훈 나주시장이 촉촉해진 눈을 살며시 감았다. 학생운동과 농민운동을 하며 투쟁과 투옥을 되풀이했던 지난 20년을 떠올리는 듯했다. 지난 21일 전남 나주시 장사마을에 모인 나머지 12명의 서울 미 문화원 점거 사건 구속자들도 모두 눈을 감았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곡이 바뀌자 이들과 함께 온 가족들이 어깨동무를 하기 시작했다. 20년 전 미 문화원 점거 당시 불렀던 노래다. 투사의 삶을 접고 생활인으로 돌아온 이들은 "꿈은 결국 생활 속에서 이루는 것"이라고 말하며 철 지난 민중가요를 밤새워 불렀다.

73명의 미 문화원 점거 가담자는 현재 사회 각계에서 생활 속의 변혁 운동을 이끌고 있다. 청년 시절 '독재 타도'와 '미국 반대'라는 틀 속에서 사회 변혁을 꿈꿨던 이들은 이제 생활 속에서 작은 실천들을 일궈내는 '삶의 변혁'을 꿈꾼다.

서울대 삼민투 위원장 출신으로 국회의원 선거에서 세차례 고배를 마신 함운경(41.열린우리당 연수센터 소장)씨는 "우리는 남을 위해 사는 것에 익숙한 세대다. 투쟁의 함성은 멈췄지만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각자의 생활 속에서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미 문화원 점거 이후 5년 동안 낮에는 구두공장 노동자로, 밤에는 노동현장에서 목회자로 활동했던 인준호(41.연세대 신학과 83학번)씨는 1999년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분신 등 사건이 끊이지 않는 노동현장을 벗어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길을 찾고 싶었다고 했다. 교육학을 전공한 인씨는 지난해부터 대안학교인 '과천자유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다. 그는 "운동이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것"이라며 "어린이들이 자신의 의지대로 바로설 수 있을 때 미래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점거 이후 통일운동을 했던 당시 서울대 조직책임자 홍성영(42.스마텍 엔지니어링 대표)씨는 97년 토목 관련 벤처기업 사장으로 변신했다. 홍씨는 당시 운동에서 얻은 조직 경험을 바탕으로 차별화된 경영 방식을 도입했다. 성적.학교.외국어 능력 등과 관계없이 직원을 채용하고 출퇴근 시간을 직원들의 자율에 맡기고 있다. 그는 "능력과 인간에 대한 이해는 경영자에게 중요한 역량"이라고 강조했다.

노동자 교육운동에 뛰어들었다가 구속됐던 박재영(41.서울대 인류학과 83학번)씨는 99년부터 민족문화추진회 전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박씨는 98년 지리산에 한문을 배우러 간 조카를 따라갔다가 한학(漢學)의 매력에 빠졌다. 이후 대전 송양정사에서 전통 한학을 배운 뒤 '한학 전도사'가 됐다. 그는 "기초가 부실한 한학 발전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으면 한다"고 말했다.

서진식(41.서강대 사학과 83학번)씨는 점거 사건 이후 학교를 자퇴하고 고향에 내려가 20년째 고물상을 운영하고 있다. 당시 구속 29일 만에 풀려났던 서씨는 이 사건 등으로 장기간 수감생활을 한 동료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에 1년 이상 대인기피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는 "10년 후에도 육체적 노동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거창한 운동보다 소박한 사람들 틈에서 성실하게 땀흘리는 것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발전시키는 일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는 "땀흘려 일해 모은 돈을 복지시설이나 시민단체에 기부하는 게 작은 소망"이라고 덧붙였다.

고려대 의대 3학년 때 이 사건으로 학업을 중단해야 했던 오경중(41)씨는 출소한 뒤 노동운동에 매달리다 10년 뒤인 95년 복학했다. 2004년 동기생보다 10년 뒤늦게 진단방사선과 전문의 자격증을 딴 오씨는 현재 인천의 한 중소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때때로 인천지역 외국인 노동자를 상대로 무료 진료를 하고 있는 그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는 가치를 이웃들에게 의술을 통해 베풀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 특별취재팀=임장혁.정강현.박성우.백일현.김호정.이충형 기자

사진=양광삼 기자 <yks23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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