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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리 장려가 글로벌 스탠더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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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일러스트=강일구]
남정호
국제선임기자

독일 남부의 소도시 라벤스부르크에는 ‘슈바비셰 차이퉁’이란 특이한 신문이 있다. 그 특별함은 신문 전체가 남부 사투리 슈바비셰어로 제작된다는 점이다. 이뿐 아니다. 북부 사투리로 된 프로그램을 내보내는 라디오 브레멘 등을 비롯해 독일에는 방언만 쓰는 방송사가 숱하다. 향토애 교육이 의무화된 바이에른주 학교에서는 명시를 사투리로 바꿔 암송시킨다. 이렇게 보존돼 온 독일 내 방언이 줄잡아 50개 이상. 가히 독일을 ‘사투리의 나라’라고 부를 만하다.

 이 못지않은 사투리 우대국이 일본이다. 메이지 유신 당시 통일국가를 지향하며 사투리를 배격했던 일본은 요즘 완전 딴판이다. 오사카의 TV는 뉴스만 빼고는 거의 모든 드라마, 연예 프로가 사투리로 제작돼 전파를 탄다. 심지어 오사카 사투리로 부른 노래가 출반돼 대히트를 치기도 한다.

 영국 본토에는 아예 다른 언어가 공존한다. 서남부에서 사용되는 켈트어의 일파인 웨일스어다. 웨일스가 잉글랜드에 합병된 16세기 이후 웨일스어는 급격히 몰락하고 영어가 득세했다. 그러나 1993년 ‘웨일스어 보호법’이 제정돼 영어와 함께 지역 공용어로 대접받고 있다. 미국 역시 90년 부시 행정부에 의해 ‘아메리카 원주민 언어법’이 제정돼 인디언어 보존에 힘쓰고 있다.

 이런 정책 뒤엔 물론 이유가 있다. 우선 독일 연구 결과 사투리를 배우면 다른 외국어도 쉽게 배우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방언은 지역사회에 대한 소속감을 증대시켜 심리적 안정감을 낳는다. 더불어 사투리는 지역 문화의 특성을 반영해 이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하다. 예컨대 제주도 사투리엔 바다와 해산물과 관련된 단어와 표현이 풍부할 수밖에 없다.

 요즘 지구촌의 메가 트렌드는 지역주의다. 지역민 상호 간의 끈끈한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삶의 터전, 즉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정치·경제 활동을 펴가자는 거다. 지역주의가 고조된 끝에 “우리끼리 더 잘살 수 있다”는 공감대가 퍼지면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최근 투표에서 부결됐지만 스코틀랜드의 분리 추진, 우크라이나 동부의 독립, 남수단의 건국 등 기존 국가에서 떨어져 나와 자치를 누리려는 움직임이 꼬리를 물고 있다. 이뿐 아니다. 미국에선 최대 주인 캘리포니아를 5개 주로 쪼개자는 논의가 한창이고 벨기에에서는 불어권인 왈론과 네덜란드어를 쓰는 플랑드르의 분리 운동이 여전하다. 글로벌리즘, 즉 세계주의는 가고 지역주의가 뜨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무릇 동향 출신끼리 만나면 살갑고 편한 게 인지상정이다. 같은 풍습, 같은 음식에 길들어진 탓에 서로의 행동이 쉽게 거슬리지 않는다. 게다가 작은 행정 단위일수록 주민들의 입맛에 맞는 맞춤형 정책이 가능하다.

 현재 진행 중인 사회 변화도 지역주의를 부추기는 쪽이다.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IT기술과 컴퓨터의 발달로 개인의 처리 능력이 혁신적으로 발전했다. 이 덕에 상하수도 및 교통신호 관리 등 국가 단위가 아니면 불가능했던 일이 소규모 지역에서도 가능해진 것이다. 글로벌화의 폐해가 심각해진 것도 지역주의 선호 현상을 부채질했다. 실제로 재정 파탄에 몰렸던 그리스에서는 위기 이후 농업인구가 크게 늘었다고 한다. 자기 땅에서 농사만 잘 지으면 나라 경제가 망하더라도 먹고사는 덴 지장 없을 거란 보호 심리가 발동한 탓이다.

 하나 유독 한국에선 지역주의란 저주 받은 주홍글씨로 통해왔다. 지역적 차별과 상호 간 갈등을 일으키는 망국적 현상으로 치부됐다. 그리하여 지역주의를 조장하는 어떠한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 지역색 덩어리인 사투리는 물론 배척 대상이었다.

 그러나 지역주의는 가치 중립적인 개념이다. 어떻게 활용되느냐에 따라 해도 되고 덕도 된다. 그간 지역주의가 문제시됐던 건 공정·평등과 같은 더 중요한 가치를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능력 여부는 싹 무시하고 동향인이라고 챙기고 밀어줬기에 문제가 됐던 거다. 특정 지역에 대한 잘못된 차별과 편견만 사라진다면 독특한 지역색을 보여주는 게 훨씬 매력적이지 않나.

 K팝, 드라마에 이어 음식 한류가 휩쓰는 세상이다. 외국인들도 이젠 한국산 김치가 아닌 돌산 갓김치를 찾는다. 더 풍요로운 한류가 꽃피기 위해서는 더 세분화된 특산물이 나와야 하고 이를 위해선 건강한 지역주의가 뒷받침해줘야 한다.

 다행인 건 망국적 지역주의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난공불락 같던 호남 땅에서 새누리당 후보가 당선된 것도 좋은 징조다. 또 영화 속 조폭들의 비속어로만 등장했던 호남 사투리가 요즘 인기 드라마 속 아리따운 여주인공의 입에서 나오는 것도 긍정적이다. 어느새 특정 지역 사투리에 대한 인식도 바뀌고 있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사투리에 대한 당국의 정책은 소극적이다. 사투리의 종말을 우려해 녹음해두는 수준이다. 정작 앞장서야 할 지방자치단체조차 방언 사용에 미적지근하다고 한다. 사투리 사용 인구가 격감하는 세상이다. 제주도 방언은 유네스코 제정 소멸 위기 언어로 등록돼 있다. 9일 한글날을 맞아 사투리와 지역주의 육성에 대한 새로운 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남정호 국제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