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핵무기 보유 시인] 협상 위한 교란전술일 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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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카드를 내세운 북한의 곡예에서는 김정일(金正日)체제를 어떻게든 유지하겠다는 평양 지도부의 전략적 목표가 엿보인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이어 이라크 후세인 정권의 몰락을 지켜본 북한으로서는 더 이상 부시 행정부에 밀려서는 안되겠다는 절박함을 느꼈을 것이란 얘기다.

중국의 중재로 마련된 베이징(北京) 3자 회담 벽두부터 미국에 '핵 개발 시인'이란 극단적인 카드를 던진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북한은 지난해 10월 켈리 특사의 방북을 계기로 불거진 '핵 개발 시인' 논란 이후 핵동결 해제 선언→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 추방→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 선언→5㎿e 원자로 재가동 등 수위를 높여 왔지만 그들 요구대로 북.미 양자 회담 테이블을 마련하는 데는 실패하고 사실상 다자 대화에 나서야 했다.

특히 이라크전과 관련, "미국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해도 전쟁을 막을 수 없다"(지난 6일.외무성 대변인)며 북.미 불가침 조약에 대한 집착 포기를 시사하는 등 현실적인 인식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 같은 상황이 북한을 더욱 극단적인 선택으로 몰아넣은 것 같다. "미국의 의도를 확인하겠다"며 기대를 갖고 회담장에 나섰지만 켈리 대표가 '선 핵포기'라는 입장을 분명히 요구하자 탐색전을 일단락지은 것이라는 관측이다.

치고 빠지는 식의 전술로 시간 벌기에 나선 게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핵 개발 카드까지 흔들면서도 "핵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방도를 제시하였으므로 미국의 태도를 지켜볼 것"(25일.외무성 대변인)이라며 회담의 판을 깨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한 대목이 그렇다.

핵 개발과 관련한 북한의 독특한 행태도 국제 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스라엘이나 남아프리카공화국처럼 핵 개발을 완료하거나 보유했던 국가들이 '확인도 부인도 않는(NCND)' 입장을 취하거나 모호성을 극대화하는 데 반해 북한은 핵 개발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다. 빈 카드를 들고 미국 등 국제 사회를 상대로 핵 도박을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 당국이 사용후 핵연료봉의 재처리 문제까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핵 카드의 몸집을 불리려는 보다 구체적인 움직임이 거세질 것이란 전망도 제기된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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