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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 꿈꾸는 도담이 "날 쳐다보는 사람들 눈길 즐겨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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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달 30일 서울 성동구 우리은행 시설관리공단지점. 박해림(22)씨가 창구에서 50대 여자 고객을 맞아 상담을 진행 중이었다. “폰뱅킹 비밀번호를 까먹었어요. 아침부터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요.” 고객이 머쓱한 표정으로 내민 휴대전화를 건네받은 박씨는 능숙하게 비밀번호를 다시 등록해줬다. “미안해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이번엔 잘 기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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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에 수십 명의 고객을 상대하면서도 박씨는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안병국 지점장은 “표정이 밝고 자신감이 넘치는 데다 실적도 좋다”고 칭찬했다.

 박씨의 외모는 한국 사람과 다를 게 없고 한국어도 유창하다. 하지만 한국 생활은 10년이 채 안 된다. 13세 때까지 베트남 호찌민에서 살다 온 다문화 가정 출신이다. 할아버지가 한국인이고 할머니와 엄마는 베트남인이다. 한국말을 전혀 못하는 상태로 입국했으나 피나는 노력 끝에 지금 수준에 올랐다. 2011년엔 수십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우리은행 고졸 공채에 합격했다. 박씨는 “기회가 되면 호찌민이나 하노이 지점에서 일하고 싶은 게 꿈”이라고 말했다.

 ‘편견과 차별의 시선에 움츠러드는 나약한 존재’. 다문화 2세에 대한 이런 통념이 요즘 들어 깨지고 있다. 당당하게 꿈을 이루거나,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다문화 2세들이 늘고 있다. 피부색과 생김새가 다른 것은 이들에게 더 이상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성가족부가 선정한 ‘유망 다문화 2세’가 그들이다.

 황도담(15)양은 모델을 꿈꾼다. 다문화 대안학교인 지구촌학교(서울 구로구)에서 만난 그는 커다란 주황색 뿔테 안경에 검은색 에나멜 구두로 한껏 멋을 냈다. 아프리카 가나 출신의 엄마와 한국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모두 숨져 지금은 김해성 목사(지구촌학교 이사장)가 운영하는 그룹홈에서 생활하고 있다. 하지만 황양의 얼굴에 그늘은 없다. “사람들이 저를 쳐다보는 시선을 즐겨요. 모델은 원래 주목받는 직업이잖아요.”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해 항상 동영상과 잡지를 끼고 살며 워킹과 포즈를 연구한다. 11월엔 한림연예예술고 패션모델과에도 지원할 생각이다. 황양은 “최고의 패션쇼 무대인 뉴욕 빅토리아 시크릿쇼에 서는 게 꿈”이라며 “다문화 2세들의 자랑스러운 누나·언니가 되겠다”고 당찬 포부를 밝혔다.

 같은 학교에 재학 중인 전미나(15)양은 통역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다. 필리핀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2년 전에 한국에 올 당시만 해도 한국어를 전혀 못했다. 하지만 2년 만에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발전했다. 전양은 “한국말을 잘한다지만 아직 스스로 만족하지 못한다”며 “어려운 단어까지 구사해야 통역사의 꿈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문화 2세가 한국에서만 꿈을 펼칠 이유는 없다. 필리핀 어머니를 둔 최종인(18)군은 카투사(주한미군 배속 한국 군인)를 지원했다. 제대 후엔 필리핀으로 건너가 변호사 공부를 할 계획이다. 최군은 “필리핀은 한국보다 법과 제도가 취약하다”면서 “교민들이 억울한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돕고 싶다”고 말했다.

 최근엔 다문화 2세가 문화·예술계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스리랑카인 어머니를 둔 지대한(13)군은 지난해 영화 ‘마이 리틀 히어로’에 출연, 제49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신인연기상을 받았다. 필리핀 어머니를 둔 한동주(14)군은 2010년 서울발레시어터 창단 15주년 기념 공연에 발레리노로 참가했다.

글=장주영 기자
사진=김경빈·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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