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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백성호의 현문우답

황벽 선사는 왜 사미를 때렸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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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백성호 기자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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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풍경1 : 저녁식사 자리였습니다. 맞은편에 앉은 목사님은 “나는 불교를 존중한다. 한때는 불교에 관심을 가졌었다. 그런데 불교는 결국 ‘공(空)’을 이야기하지 않나. 마지막에는 공만 남는 거다. 어쩐지 허탈하다”고 말하더군요. 일부러 불교를 폄훼하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목사님의 솔직한 생각이었습니다. 불교에 대해 그런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교인은 꽤 많습니다.

#풍경2 : 젊은 사미(사미계를 받고 아직 비구가 되지 않은 승려)가 불상을 향해 절을 하는 황벽 선사에게 도발적으로 물었습니다. “부처를 구할 필요도 없고, 법을 구할 필요도 없고, 중생을 구할 필요도 없는데 스님께선 무엇을 구하고자 절을 하십니까?” 사미의 물음에 황벽이 답했습니다. “부처를 구할 필요도, 법을 구할 필요도, 중생을 구할 필요도 없지만 일상의 예법이 이와 같은 일이다.”

사미가 다시 받아쳤습니다. “굳이 절을 해서 무엇을 하려는 겁니까?” 그러자 황벽 선사가 손바닥으로 사미를 한 대 갈겼습니다. 깜짝 놀란 사미가 대꾸했습니다. “너무 거칩니다!” 황벽이 답했습니다. “여기에 무엇이 있다고 거칠다, 부드럽다 하는가!” 황벽이 손바닥으로 한 대 더 갈겼습니다. 사미는 멀리 도망가 버렸습니다.

대체 왜 그랬을까요. 황벽은 왜 사미를 때렸고 “일상의 예법이 이와 같다”고 답한 걸까요. 모두가 공(空)이라면 왜 굳이 절을 하는 걸까요. 어차피 물거품이라면 말입니다. 불교의 공은 대체 어떤 공일까요.

그리스도교에는 창조의 자리가 있습니다. 다름 아닌 신의 자리입니다. 거기서 빅뱅이 일어나고, 천지가 창조됐습니다.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는 예수의 메시지는 한마디로 “신의 자리로 들어오라”는 뜻입니다. 말처럼 쉽진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 위에 자신의 에고를 못박으며 그 자리로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신의 자리는 에고가 없는 자리니까요.

여기서 물음이 날아갑니다. “에고가 없는 자리는 결국 내가 없는 것 아닌가.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지 않나. 그럼 불교의 공과 무엇이 다른가.” 이런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리스도교는 이렇게 답을 합니다. “그때는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다. 신의 자리가 드러난다. 그래서 그 ‘신의 자리’가 나를 통해 살게 된다.” 사도 바울은 ‘신의 자리’를 체험한 뒤 실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산다!”

그렇게 살면 어찌 될까요.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신의 자리’는 창조의 자리니까요. 그런 ‘신의 자리’가 나를 통해 사니까 삶이 창조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불교에도 그런 창조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공(空)’입니다. 텅 비어서 허망한 공이 아니라, 텅 비어서 무한대로 창조하는 공입니다.

그럼 황벽 선사는 왜 절을 했을까요. 자신의 눈앞에 불상이 있으니 지혜롭게 흐른 겁니다. 절집의 예법. 그게 황벽의 창조물입니다. 그걸 통해 황벽은 ‘공의 정체’를 보여줬습니다. 공은 한마디로 ‘모든 소리를 만들어내는 고요’입니다. 필요한 지혜를 마구마구 만들어내는 공입니다.

그래도 사미는 알아듣지 못합니다. 황벽은 한 대 더 때렸습니다. 사미는 반발합니다. 아프니까요. 모든 게 공이라면 아픈 것도 공일 텐데. 굳이 반발할 이유가 없을 텐데 말입니다. 황벽이 사미에게 몸소 일러줍니다. 봐라! 너는 공의 자리에서 아프다는 느낌, 거칠다는 생각을 창조하지 않았느냐고. 그게 공의 정체라고 말입니다. 이걸 정확하게 알면 그리스도교와 불교는 상대의 심장을 꿰뚫는 종교 간 소통을 하게 됩니다.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