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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백성호의 현문우답

가도 30방, 안 가도 30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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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기자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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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풍경1 : 조선 500년과 일제 식민지를 거치며 한국 불교는 쪼그라들었습니다. 근대에 한국 불교를 다시 일으킨 이가 경허 선사(1849~1912)입니다. 경허가 아꼈던 제자 셋이 있습니다. 수월(水月), 만공(滿空), 혜월(慧月). 그들을 ‘경허의 세 달’이라 부릅니다. 하루는 수월 스님이 만공 스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뜬금없이 숭늉 그릇을 내밀었습니다. “여보게 만공. 이걸 숭늉 그릇이라고 하지 말고, 숭늉 그릇이 아니라고도 하지 말고. 한마디 똑바로 일러 보소.”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만공 스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방문을 열더니 그 숭늉 그릇을 밖으로 휙 던져버렸습니다. 그릇은 박살이 났겠죠. 만공 스님은 돌아와 자리에 앉았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걸 본 수월 스님이 말했습니다. “잘하였소. 참으로 잘하였소.”

 #풍경2 : 수년 전에 한 스님과 마주했습니다. 중국 임제 선사의 일화를 꺼내더군요. “저 방으로 들어가도 30방, 들어가지 않아도 30방일세. 자, 어떻게 대답하겠나?” 방문을 넘어가도 30방을 맞아야 하고, 넘어가지 않아도 30방을 맞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차피 30방이라면 안도 밖도 아닌 문지방 위에 서 있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실 분도 있겠네요. 그렇게 잔머리를 굴려도 30방이 날아갈 겁니다.

 수월 선사의 물음과 임제 선사의 물음은 맥이 통합니다. 앞으로 가도 절벽, 뒤로 가도 절벽입니다. 선문답은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에게 묻습니다. 까마득한 절벽에서 앞으로도 못 가고, 뒤로도 못 가는 우리를 겨눕니다. ‘자, 어떡할 건가. 이 진퇴양난의 위기를 어떻게 넘을 건가. 어디 대답 한번 해보시오!’

 무한경쟁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도 종종 이런 절벽 위에 섭니다. 회사에서는 기존의 제품과 시장을 확 뛰어넘을 창조적인 아이템을 찾습니다. 그걸 위해 머리를 쥐어짭니다. 앞으로 가면 다른 제품과 비슷하고, 뒤로 가도 획기적인 맛이 없습니다. 그런 ‘절벽’에서 어떡해야 할까요.

 그 단초를 수월과 임제의 일화가 일러줍니다. 우리는 대부분 ‘절벽 안’에서 생각합니다. 여기서 왼쪽으로 갈까, 오른쪽으로 갈까. 어떡해야 절벽을 피할 수 있을까. ‘절벽’은 하나의 무대입니다. 그 무대 위에서 이 길로 가든, 저 길로 가든 큰 차이는 없습니다. 무대 자체를 벗어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이 제품도 새로울 게 없고, 저 제품도 남다를 게 없습니다.

 만공 스님의 해법은 달랐습니다. “숭늉 그릇이라고도 하지 말고, 숭늉 그릇이 아니라고도 하지 마라”는 수월 앞에서 그릇을 깨버렸습니다. 사실 무엇을 깬 걸까요. ‘수월의 기준’ ‘수월의 잣대’ ‘수월의 무대’를 깨버린 겁니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새로운 차원, 새로운 무대가 펼쳐집니다. 숭늉 그릇을 깨버리는 순간, 수월이 제시한 절벽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숭늉 그릇’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내가 만든 기준’ ‘내가 만든 잣대’입니다. 그래서 가톨릭에선 “내 탓이오!”라며 가슴을 치는 겁니다. ‘나’가 있어서, ‘나’로 인해 절벽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한때 선(禪)불교에 심취했습니다. 그도 선문답 속의 ‘숭늉 그릇’을 들고 적잖이 고민했을 겁니다. 결국 잡스는 나름의 그릇을 깨고 스마트폰이란 새로운 무대를 열었습니다.

 삶에서 우리는 각자의 ‘절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들어가도 30방, 안 들어가도 30방.’ 어떡하실 건가요. 그걸 뛰어넘고 싶으세요? 그렇다면 그 물음을 던진 임제 선사를 ‘팍!’ 하고 밀쳐버리세요. 그 순간, ‘30방’이 사라져버립니다. 임제가 만든 기준, 임제가 만든 절벽이 없어집니다. 바로 그때 차원이 다른 세상이 펼쳐집니다.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