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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터디·함께주택 … 핏줄 아닌 사회적 가족이 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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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서울 노원구 월계3동에 사는 유수연(75) 할머니는 1년 전 남편과 사별한 뒤 34평 아파트에서 혼자 살아왔다. 유 할머니에게 한 달 전 새로운 손녀가 생겼다. 대학생 임민경(20·여)씨다. 구청의 주거공유 프로그램 ‘한지붕 세대공감’을 통해 임씨가 유 할머니 집에 들어온 것이다. 이제 매일 아침 임씨를 깨우는 건 할머니의 밥 짓는 소리다. 끼니 거르는 때도 많았던 유 할머니로선 적적함을 덜게 됐고 임씨로선 안정된 집을 얻게 된 것이다.

 2014년 대한민국 가족의 풍경이 바뀌고 있다. ‘부모+자녀’같이 혈연 관계로 맺어진 가족은 줄고 사회적 관계로 맺어진 ‘사회적 가족’이 늘고 있다. 사회적 가족은 혈연관계 없이 가족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가족을 넘어선 가족’이다. 1인 가구의 급증이 그 원인이다. 혼자 살며 겪게 되는 외로움과 경제적 불안정 등의 문제를 공거(共居·공동 거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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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같은 사회적 가족의 출현은 본지 취재팀이 지난 18~19일 대학생 세대와 부모 세대 100명(20대와 60대 이상 50명씩)을 면접 조사한 결과에서도 확인된다. ‘혈연관계나 법적 관계가 없는 동거인을 가족으로 볼 수 있느냐’는 물음에 대해 20대의 32%, 60대 이상 28%가 그렇다고 답했다. 이는 2004년 동덕여대 남기철 교수가 조사한 결과(20대 18.6%, 부모세대 14.3%)와 비교하면 두 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다. ‘멀리 떨어진 가족 대신 이웃과 가족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응답자가 20대와 60대 이상 모두 36%에 달했다.

 가족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 가족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했던 다양한 형태를 가족으로 볼 수 있다는 응답이 크게 늘었다. 변화는 특히 20대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애완동물도 가족으로 볼 수 있느냐’는 질문에 20대 이상은 54%가, 60대 이상은 16%가 동의했다. ‘여성 동성애자 커플과 그들이 키우는 아이를 가족으로 보느냐’는 물음에도 20대의 76%, 60대 이상 40%가 그렇다고 응답했다. 경기개발연구원 김희연 연구위원은 “가족의 정의가 기존의 통념을 넘어 확장되고 있다”고 말했다.

 사회적 가족의 대표적인 유형은 최근 늘고 있는 공용주택들이다. 공용주택은 입주자들이 사생활을 누리면서 공용공간에서 가족처럼 생활하는 주거 방식이다. 서울 마포구 성산동 ‘함께주택’ 1호도 공용주택이다. 일면식조차 없던 이들이 인터넷에서 입주자 모집 공고를 보고 모이게 됐다. 입주 초반에는 어색한 점도 있었지만 아침·저녁마다 함께 밥을 먹으며 나누는 대화가 서로를 묶었다. 입주자 강숙진(31·여) 씨는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에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가족의 끈끈한 정이 그리워 입주신청을 했다”고 말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밥터디’(자취생·고시생 등이 식사시간마다 밥만 먹고 헤어지는 모임) 문화나 소셜다이닝(Social-dining·1인 가구들이 함께 모여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모임을 주선하는 인터넷 서비스) 업체가 주도하는 ‘집밥’ 모임도 사회적 가족의 일종이다. 경북대 노진철 사회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는 식구(食口)에게서 느끼는 유대감이 유독 강하다”며 “1인 가구 증가에 따라 ‘밥터디’ ‘집밥’ 형태의 사회적 가족이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가족 개념의 확장이 1인 가구 증가로 생기는 사회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대안”이라고 지적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에 따르면 1인 가구들은 ‘경제적 불안정’(20~30대), ‘외로움’(40~50대), ‘간호해줄 사람 없음’(60대 이상) 등 세대별로 다른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다양한 세대가 함께 살면 서로의 어려움을 상쇄해줄 가능성이 크다. 서울여대 정재훈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2006년 독일에서 시작된 ‘다세대 공동주거’가 우리 사회에도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있다”며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한 집이나 마을에 모여 사는 ‘재(再)가족화’를 통해 각 세대가 필요로 하는 돌봄의 기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적 가족이 1인 가구 증가에 따른 문제점을 해소할 대안으로 떠오르면서 지방자치단체들의 지원도 활발해지고 있다. 서울시는 앞으로 1440억원을 들여 공동체촌 48곳을 조성할 계획이다. 여러 세대가 어울려 생활하는 서울시 협동조합형 공공주택도 오는 28일부터 첫 입주를 시작한다.

 경기도는 지난해 7월부터 안양시·광명시 등에 홀로 사는 노인들을 위한 공동 생활주택 ‘카네이션 하우스’ 10곳을 마련하고 일자리와 의료검진 서비스 등을 제공하고 있다. 변창흠(세종대 행정학과 교수) 한국도시연구소장은 “우리나라에서는 공공주거공간을 조성하기 위한 땅이나 건물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 게 문제”라며 “공용 공간을 확보할 경우 건축법상 층고 완화나 용적률 조정 등 혜택을 주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특별취재팀=정강현 팀장, 채승기·고석승·안효성·장혁진 기자, 고한솔(서강대)·공현정(이화여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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