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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성 위기의 노조] 上. 비리 부른 비민주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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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소수의 대의원들이 연맹 집행부를 뽑는 (현행)선거제도에서는 대의원들만 잘 구워삶으면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당선될 수 있다. 비리를 저지르고도 전국택시노련 위원장에 뽑힌 권오만(한국노총 사무총장 )씨처럼 장기 집권하며 또 비리를 저지를 수 있다는 얘기다."

강원도 원주시의 한 택시회사에 다니는 C씨는 조합원들이 지역을 대표하는 대의원조차 직접 뽑을 수 없는 산별노조 선거제도로는 비리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 비리 낳는 노조의 비민주성=전.현직 집행부의 금품 수수 비리사건이 터진 한국노총 산하 전국택시노조연맹의 조합원은 9만5000여 명. 택시업의 특성상 전국 900여 개 회사에 조합원이 흩어져 있지만 이들의 의사를 대변하는 대의원은 고작 170명에 불과하다. 그나마 이들도 지역의 택시근로자들이 직접 뽑는 게 아니라 각 택시회사 지부장 등 소수의 간부들이 선출한다.

택시노련 원주시 지부는 지난 3월 시지부장 선거위원 수를 기존 8명에서 24명으로 늘렸다. 각 회사에서 지부장만 대표로 참여하는 선거제도로는 조합원들의 뜻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다는 여론을 수용한 것이다. 하지만 택시노련 중앙에서는 선거 규정을 들어 이를 무효화했다. 원주시 지부는 결국 시지부장을 다시 뽑아야 했다.

택시노련의 경우 이런 과정을 거쳐 뽑힌 대의원들이 선출한 감사와 2~3명의 회계위원이 연 2회 연맹의 회계자료를 조사한다. 그러나 회계결산자료와 감사결과는 대의원대회 당일 사업보고서에 첨부돼 대의원들에게 잠깐 공개될 뿐 대다수 일반 조합원들은 구경하기조차 힘들다.

회계감사를 맡은 내부 인력의 전문성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한국노총 산하 한 산별노조 관계자는 "회계.경리 등 경영진과 가까운 인력은 노조원이 될 수 없는 규정 때문에 대부분의 노조가 전문성을 갖춘 내부 감사 인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고 털어놓았다.

'노조 개혁과 민주화 추진운동본부(www.unred.or.kr)'의 김철용 대표는 "노조의 권력화와 비민주성이 비리를 낳는 요인"이라며 "조합원이 집행부를 견제할 수단이 없는데 노조 내부의 감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할 리 없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노조 개혁을 위한 시민단체를 만든 김 대표는 산별노조의 비상근 간부로 일하며 간선제 등 조합의 비민주성과 예산 집행의 문제점을 거론했다가 조합원 자격을 박탈당한 경험이 있다.

이 단체의 조사에 따르면 현재 한국노총의 19개 산별연맹 중에서 8개 연맹이 홈페이지조차 갖추고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모두 일반 조합원이 홈페이지를 통해 조합의 구체적인 회계명세를 볼 수 있게 한 연맹은 한 곳도 없었다.

◆ 노조 간부 장기재직도 비리 조장=우리나라에선 노조 간부를 마치고 현업으로 복귀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민주노총 김태현 정책실장은 1995년 당시 양대 노총의 선출직 임원이었던 43명의 8년 뒤 진로를 조사한 결과 현업 복귀는 27.9%(12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노조 일을 계속하거나 정부기관.정당 등 다른 분야로 진출했다. 또 양대 노총 선출직 임원 185명의 역임횟수를 조사한 결과 한국노총의 경우 3회 18.1%, 4회 이상이 24.1%나 됐다. 민주노총은 3회 11.6%, 4회 이상이 10.1%였다. 한국노총 선출직 간부들의 경우 7년 이상 재직하는 비율이 57%에 이르렀고 9년 이상 재직자도 41.4%나 됐다.

고인 물이 썩듯이 노조 간부의 장기 재직은 권력 독점을 낳아 비리로 이어질 가능성을 키운다. 경기도 소재 한 금속업체의 노조원은 "간선제로 선출한 위원장이 12년이나 재임하면서 조합비와 기금 사용 내용을 제대로 공개하지 않는 전횡을 일삼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합원 수가 많은 일부 대규모 노조는 막강한 교섭력을 무기로 사측으로부터 각종 이권을 제공받기도 하고 이 과정에서 비리가 발생하기도 한다. 실제로 횡령 등 부정 건수도 대규모 노조가 중소규모 노조에 비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노동연구원 김정한 연구위원이 567개 노조를 조사한 결과, 조합원 1000인 이상 대규모 노조는 횡령 등 부정으로 임원이 불신임을 받거나 조직 유지에 어려움을 경험한 비율이 22.6%로 전체 노조의 평균치(13%)보다 훨씬 높았다.

노동부 관계자는 "노조가 파업하면 회사가 큰 손해를 본다는 부담 때문에 회사 측이 노조에 각종 특혜를 주는 등의 경우가 있다"며 "이 같은 일부 기업의 잘못된 관행이 노조 비리를 부추긴 면이 있다"고 말했다.

정철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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