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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글로벌 아이

2005년 5월 교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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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인천공항은 비. 물기 머금은 파란 날개 아래로 초록 산야가 멀어져 간다. 신문 2개를 꼼꼼히 읽고 나니 간사이(關西)공항. 비가 내린다. 1시간25분의 비행거리가 날씨를 바꾸지는 못했다. 가깝고도 먼 곳.

'웰컴(Welcome)' '요코소(ようこそ)'와 나란히 '잘 오셨습니다'. 한글 천지다. 신용카드로 차려입은 한국인을 향한 윙크? 교토(京都)행 특급열차 '하루카'. 1시간13분의 상념이 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간다. JR 교토역 30번 플랫폼.

"한국에서 오셨습니까." 역사(驛舍) 2층 교토시 관광안내소. 한글로 된 지도와 안내책자를 내미는 창구 여직원의 미소는 봄빛. 그녀는 또박또박 한국어로 말했다. 일본어를 못해도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행인의 절반은 영 레이디. 형형색색(形形色色). '제 멋에 산다'는 소리 없는 아우성. 호텔 벨보이는 90도로 허리를 꺾었다.

5월 8일. 교토의 리가 로열 호텔. 아시아와 유럽 22개국 신문쟁이 26명이 모였다. 커피 브레이크의 화제는 북한 핵. 만의 하나 미국이 북한을 공격한다면 한국은 미국 편을 들어 북한과 싸울 것이냐고 묻는 중국 기자. 싸우면 결국 한국과 미국이 이길 텐데 왜 북한의 핵 위협에 끌려다니는지 모르겠다는 폴란드 기자. 미국이 의도적으로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는 것 같다는 프랑스 기자. 쏟아지는 질문들…. 아시아.유럽 언론인 세미나의 긴 하루.

호텔 방 TV에서 한국 드라마 '올인'을 봤다. 송혜교와 이병헌의 일본어 대사. 새삼 가슴을 저며오는 한국, 한국인. TV로 본 긴키(近畿)의 산촌(山村). 홀로 사는 촌부(村婦)가 여는 냉장고 문 위에서도 '욘사마'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과거와 현대가 조화를 이룬 천년 고도(古都) 교토. '잃어버린 10년'의 질곡 속에서도 교토의 정보기술(IT) 기업들은 나홀로 잘나갔다. '교토식 경영'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은 9명의 일본인 중 5명이 교토대학 출신. 교토의 전통적 장인(匠人)문화가 바탕이 됐다는 설명. 교토식 경영을 연구하는 한국 기업들도 있다.

도쿠가와(德川) 막부(幕府)의 별궁이었던 니조조(二條城). '한국어'라고 써진 단추를 누르자 성의 유래를 설명하는 낭낭한 모국어 소리가 성 안의 고요를 깬다. 다이묘(大名)들을 접견하는 쇼군(將軍). 마룻바닥에 내딛는 낯선 발걸음이 만들어 내는 휘파람새 울음소리. 칼을 감추고 미소를 짓는 일본인.

16세기 조선 침략의 주역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그가 죽은 뒤 부인이 남편의 넋을 달래려 지었다는 절 고다이지(高臺寺). 부부의 목좌상(木坐像)이 안치된 오타마야(御靈屋) 앞에서 관람객을 안내하던 수려한 처자(處子)는 한국에서 온 유학생. 마주친 사람이 한국인임을 알아보고 친절하게 모국어로 설명을 바꾼다. 세월이 도요토미와 함께 만들어낸 파트 타임 아르바이트. 에피소드가 쌓이면 역사가 된다. 에피소드는 역사의 부록이 아니다.

과거에 발목 잡힌 한국과 일본.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 때문에 유럽 통합은 가능했다. 한국과 일본의 진정한 화해 없이 동아시아 공동체는 요원한 꿈. 위정자(爲政者)들의 삭막한 말싸움 속에서도 서로를 찾는 사람들의 에피소드는 끝없이 이어진다.

다시 보는 영종도. 한반도에 드리운 북핵의 암운. 아랑곳하지 않고 밀려오는 일본인 관광객들.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되지만 과거에 매여서도 안 된다는 역사의 교훈. 꿈과 비전이 미래를 만든다. 2005년 5월 교토의 추억.

배명복 국제문제담당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