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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차의 역사 '포니 정' 눈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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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고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을 말할 때는 '형님 정주영'과 '자동차'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있어 이 두 가지는 인생의 전부"라고 말한다. 맏형인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그의 인생을 이끈 이정표였다면, 자동차는 일생을 쏟아부은 사업이었다.

▶ 이건희 삼성 회장이 22일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된 고 정세영 명예회장의 빈소를 찾아 헌화하고 있다.강정현 기자

2000년 11월 72세에 출간한 '미래는 만드는 것이다' 자서전 출판 기념회에서 고 정세영 명예회장은 이런 말을 했다. "한국의 중추 산업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한 자동차공업에 일생을 바쳐온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이런 자부심은 형님의 따뜻한 배려와 따끔한 질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28년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에서 태어난 고인은 맏형을 따라 월남했다. 고려대를 졸업하고 미국 마이애미대(오하이오주)에서 정치외교학 석사를 받고 귀국한 57년만 해도 그는 교수나 정치가가 되는 게 꿈이었다.

그러나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사업을 함께하자"는 요청을 뿌리칠 수 없었다. 평소 "큰형님이 잘돼야 집안이 잘된다"는 신념이 확고했던 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57년 맡은 일이 현대건설 상무이사. 전후 복구사업에 필요한 시멘트를 공급하기 위해 단양시멘트 공장을 지었다. 65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공사인 태국 빠따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했다. 이 공사의 경험은 이후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초석이 됐다.

그는 67년 현대자동차가 설립되자 사장에 올랐다. 74년에는 국내 최초로 개발한 고유모델 '포니' 승용차를 토리노 국제모터쇼에 출품해 세계 자동차업계를 놀라게 했다. 이때부터 국내외 언론에서는 그를 '포니 정'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고인의 가장 큰 공적은 수출 경영과 자동차 국산화로 요약된다. 경쟁사였던 기아차.대우차가 외국업체와 손잡고 엔진과 차체 개발을 상당 부분 의존할 때다. 그는 "기술이 없으면 자동차 회사는 망한다. 엔진부터 자동변속기까지 핵심 기술을 모두 우리 힘으로 해야 한다"며 국산화를 이끌었다.

1999년 현대차 경영에서 물러나 현대산업개발을 맡았으나 폐암 진단을 받는 바람에 투병 생활을 해야 했다. 외아들인 정몽규 회장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고 자신은 주로 산책과 독서로 소일했다. 장지가 양수리로 결정된 것은 고인이 수상스키를 좋아해 양수리의 빼어난 풍광에 반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빈소를 지키고 있던 한 관계자는 "고인은 70대에 들어서도 수상스키를 즐길 정도였다"면서 "생전에 '한강이 잘 보이는 양수리에 묻혔으면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말했다.

고인은 수상스키협회장을 맡아 국내 수상스키를 보급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85년 금탑산업훈장, 95년 아시아 최우수 경영인상, 98년 국민훈장 목련장 등의 훈.포장을 받았다.

정 명예회장의 별세로 현대가의 창업 1세대 6형제 중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 등 3명이 세상을 떠났다. 1세 중 정상영 KCC명예회장을 제외한 정인영 한라 명예회장과 정순영 성우 명예회장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이에 따라 범(汎)현대가는 정몽구 회장을 중심으로 한 2세 경영인들이 경영을 맡고 있으며, 최근에는 일부 3세도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한편 현대산업개발의 경영권 승계는 순조롭게 이뤄졌다. 고 정 명예회장의 보유지분 542만 주(7.2%)는 지난 18일 정몽규 회장과 큰 사위 노경수씨, 막내딸 유경씨에게 넘겨졌다. 사실상 기업 상속 절차가 끝난 것이다.

황성근.김태진 기자 <hsgun@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cogit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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