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다 웃다 80年] 11. 첫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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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 형사와 범인 사이의 연민과 의리를 그린 영화 '형사 배삼용'(1975년작)의 한 장면.

순식간에 악극단을 꾸렸다. 기성 배우와 연구생들을 합하면 스무 명쯤 됐다. 돈을 대는 사람이 있었다. 쌀장사로 큰 돈을 번 '뚝건달'이라고 했다. 주먹질은 못하면서 폼만 잡는 건달을 당시엔 '뚝건달'이라고 불렀다. 서울 북아현동의 허름한 여인숙에 방을 잡았다. 그리고 합숙에 들어갔다. '며느리 설움'과 비슷한 내용의 악극을 맹연습했다.

가끔 여유가 생길 땐 단원들과 종로의 화신백화점(지금의 종로타워 자리)을 찾았다. 쇼핑 때문이 아니었다. 화신백화점에는 국내 최초의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돼 있었다. 발을 얹으면 '지이~잉'하고 계단이 마술처럼 올라갔다. 아무리 봐도 신기했다. 우리는 백화점 1층에서 꼭대기까지 수십 번씩 오르락내리락 했다. 지겨운 줄도 몰랐다. 그러다 밥 시간에 늦으면 북아현동까지 냅다 뛰었다.

그렇게 두 달이 흘렀다. 경기도 평택에서 첫 공연을 올리고 경북 안동으로 향했다. 나는 여전히 트럭 짐칸 신세였다. 주연 배우인 김화자는 늘 운전석 옆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그가 짐칸으로 건너왔다. "신참 여배우가 너무 춥다잖아요. 그래서 양보했죠."

나는 단원들에게 억지를 부려 담요 두 장을 빼앗아 내밀었다. "배씨도 추울 텐데 옆으로 와요." 우리는 함께 담요를 둘렀다. 담요 밑으로 그가 살짝 팔짱을 꼈다. "아세요? 사람이 난로에요." 새벽 네 시에 안동에 도착했다. 먼 길이 너무나 짧게 느껴졌다.

배우들은 여인숙으로 직행했고, 연구생들은 극장에 가서 무대장치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숙소에 갔더니 잘 곳이 없었다. 남자들이 자는 방은 발 디딜 틈도 없었다. 그렇다고 여자 방에서 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연구생들은 극장 바닥에서 자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러기 싫었다. 지난 겨울, 극장에서 자다가 동태가 될 뻔한 적이 있었다.

얼마 후 옆방 문이 열렸다. 김화자였다. "아니, 여기서 뭐해요?" "그게, 잘 곳이 없어서…." 그는 들어오라고 했다. "이 방은 넓어요. 추워서 다들 옷을 껴입고 자니까 괜찮아요." 나는 쭈뼛쭈뼛했다. "상관없대도. 배씨랑 같이 있다고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하긴 그랬다. 그는 주연배우, 나는 연구생. 스캔들이 날 사이가 아니었다.

방에는 여배우 세 명이 자고 있었다. 장거리 여행 직후라 곯아떨어져 있었다. 웃목에 쪼그리고 앉았다. "거긴 얼음장이에요. 내려와요." 그는 자기 이불을 내게 덮어 주었다. "걱정 말아요. 이불 같이 덮는다고 이상할 건 없으니까. 잠이나 푹 자요." 눈을 감았다. 간혹 그의 입김이 내 볼에 닿았다. 팔꿈치가 살짝 닿기도 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잠이 오질 않았다.

잠든 줄 알았던 그가 속삭였다. "배씨, 잠버릇이 나쁜가 봐." 순간적으로 그에게 입술을 포갰다. 그리고 꼬옥 끌어안았다. "왜 이래요?" 그는 놀란 목소리로 몇 번 되묻다가 잠잠해졌다. 추운 겨울밤, 우린 숨을 죽인 채 사랑을 나누었다. 내겐 첫사랑이었다.

배삼룡 코미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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