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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논하다] "국경 초월한 네트워크가 세계 권력 재편할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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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 사진=김춘식 기자

서점마다 미래를 예측하는 책들로 넘쳐나고 있다. 그만큼 앞날에 대한 불안감이 크다는 뜻이다. 미래는 신(神)의 소관, 또는 역술인이나 주술사의 영역으로 치부돼 왔다. 그러나 과학적 방법으로 미래를 탐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래학자(futurist)'들이다. 제롬 글렌(59) 유엔 미래포럼 회장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미래학자다. 유엔이 후원하는 '밀레니엄 프로젝트'의 책임자이기도 하다. 그가 티모시 맥(58) 세계미래학회 회장과 함께 방한했다. 20일 끝난 SBS 디지털 포럼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18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두 사람이 만나 현재와 미래의 세계를 논했다.

-인류는 평화와 번영에 대한 희망과 기대 속에 새 천년의 문을 열었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 인류는 9.11 테러의 충격과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 전쟁이 남긴 공포로 신음하고 있다. 인류가 당면한 가장 큰 도전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티모시 맥="평화와 공동 번영의 실현이다. 경제와 기술적으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는 여전히 큰 격차가 있다. 기술과 경제 발전의 혜택이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제롬 글렌="'밀레니엄 프로젝트'는 인류가 당면한 도전을 지속 발전, 수자원 갈등, 인구와 자원 균형, 빈부 격차, 테러와 민족 갈등, 국제범죄, 지구촌 윤리 등 15가지로 정리했다. 그중 어떤 것이 가장 큰 도전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각각의 문제가 신체 조직처럼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도전을 한 가지만 들라면 인공지능(AI)의 발달이다. 향후 20~30년 내에 인공지능 분야는 급속한 발전을 이룰 것이다. 그것을 인류에 해악이 아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현명하게 활용하는 문제는 앞으로 우리가 직면할 심각한 도전이 될 것이다."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는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의 격차를 가리키는'디지털 디바이드'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디지털 유토피아'는 실현가능한 꿈이라고 보는가.

▶글렌="경제적 격차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디지털 격차는 이미 사라졌다고 본다. 인도와 중국을 보면 자명하다. 중국은 이미 세계 최대의 인터넷과 휴대전화 사용 인구를 가진 나라가 됐다. 인도는 정보기술력을 이용해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룩하고 있다."

-세계 각국의 경제 주체들이 가속적으로 글로벌 경쟁 체제에 편입되고 있다.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은 모든 사람에게 축복인가.

▶글렌="'모든'보다는 '더 많은' 사람이라는 표현이 적합하다. 모든 전환 과정에는 피해자가 생기게 마련이다. 청소년이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아동과 성인의 중간 과정에서 겪는 진통이 불가피하다. 지구에서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는 사람이 10억 명이고, 2달러 미만으로 사는 사람이 20억 명이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수십억 명은 인간다운 삶을 누리고 있다. 이는 분명히 과거보다 나아진 것이다."

▶맥="글로벌라이제이션이 모든 사람에게 축복인지는 모르겠다. 변화에는 항상 양면성이 있게 마련이다."

▶글렌="신체는 근육.신경.피부 등 수많은 조직으로 구성돼 있고 각 부분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하지만 그동안 세계는 그렇지 못했다. 서로 따로 움직여 온 각 부분을 연결해 상호의존성을 갖도록 통합함으로써 최적의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 바로 글로벌라이제이션이다."

-하지만 글로벌라이제이션은 미국식 기준과 가치의 확장이라는 비판이 있다.

▶글렌="대수학이 처음 유럽에 전파됐을 때 이를 아랍 문화의 확장으로 보는 시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대수학이 어디서 처음 시작됐는지 기억하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미국이 글로벌라이제이션 초기에 앞장선 것은 사실이다. 다국적 기업의 탄생도, 인터넷의 보급도 미국에서 처음 시작됐다. 하지만 앞으로 10년 후 소니나 필립스가 어디서 처음 시작된 기업인지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글로벌라이제이션과 미국을 연관짓는 질문은 5년 내 사라질 것으로 본다."

▶맥="글로벌라이제이션 초기에 미국이 수혜자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곳곳에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미국 기업들을 압박하는 다른 나라 기업들이 늘어나면서 미국의 글로벌 경쟁력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내부 혁신을 통해 경쟁력을 회복하지 못하면 미국은 글로벌라이제이션의 피해자로 전락할 수 있다."

-미국은 21세기의 제국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가 맞다면 미국의 제국적 지배력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는가.

▶글렌="미국인들의 공통 목표가 제국인지 의문이다. 설사 그렇다 해도 마지막 제국이 미국이 될지, 아니면 중국이 될지도 의문이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앞으로 '상호의존적 글로벌 통합체(global interdependent unity)'라는 개념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사이버 공간은 점점 3차원성을 갖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다. 3차원 가상 공간을 통해 국경을 뛰어넘어 사람들이 점점 상호 의존성을 갖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이는 국경이나 국적과 무관한 수많은 글로벌 네트워크의 출현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전통적 의미의 통치나 지배 개념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상호 의존적 글로벌 통합체가 전통적 의미의 권력을 초월하는 힘을 발휘하게 된다는 얘기다. 어느 나라가 패권을 갖고, 누가 누구 위에 군림하고 지배한다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3차원 가상공간에서 이루어진 각각의 네트워크가 종횡으로 연결돼 그 전체가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형태로 세계의 권력 체제는 급속히 재편될 것이다. 이것은 이미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미국이 국제사회 의장 역할을 계속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맥="앞으로 영향력이라고 하는 말은 '정보의 효율적 공유 능력'으로 정의가 바뀔 것이다. 전통적 의미의 정치.경제.군사적 지배력을 근거로 영향력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누가 더 네트워크 구조를 효과적으로 잘 만들어내고, 잘 이끌어 가느냐에 따라 영향력이 결정될 것이다."

-'테러와의 전쟁'을 어떻게 전망하는가.

▶글렌="유전공학과 생명공학의 급속한 발전과 보급으로 2025년께면 한 개인이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가공할 바이오 무기를 만드는 일도 가능해 질 것이다. 이른바 '사이매드(SIMAD=Single Individual Massively Destructive)'가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종류의 개인이 제기할 테러의 위험성은 알카에다와는 비교가 안 된다. 앞으로 50년 후 80억~90억 명에 이를 세계 인구의 안전을 이런 개인이 제기할 위험으로부터 어떻게 지켜내느냐는 인류가 직면할 중대한 도전이 될 것이다."

▶맥="자기 목숨을 던져 남에게 피해를 주겠다고 마음먹은 개인들에게서 안전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결국 테러에 대한 효과적인 대책은 교육과 정치.경제적 개혁뿐이다. 이를 통해 테러리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동인(動因)을 억제해야 한다."

-앞으로 10년 후 가장 유망한 업종이나 분야는 어떤 것이 될 걸로 보는가.

▶맥="획기적 기술 발전이 예상되는 분야다. 평균수명 연장과 노령인구 증가라는 인구동태학적 변화와 관련한 분야, 레저 수요 증가 등과 관련한 문화 분야 및 에너지.환경 .신물질 개발 분야가 될 것으로 본다. 인공지능.수소에너지.인공장기.레저 가이드.은퇴 노인 관련 서비스 분야가 유망할 것이다."

-중국이 경제.군사적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언젠가 미국과의 충돌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글렌="전통적 사고의 소산이다. 전통적 사고에 따르면 1960~80년대 냉전시대에 미국과 소련 간에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예측했지만 결국 빗나갔다. 더구나 지금은 냉전시대에 비해 위기 감지 시스템이 훨씬 발달해 있다. 그 결과 기습공격은 과거보다 훨씬 어려워졌다. 또 전쟁이나 분쟁을 예방하는 분야에 헌신하는 개인과 국제적 단체들의 활동이 대폭 강화되고 있는 점도 과거와 다른 점이다."

▶맥="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서로에게 경제적으로 이익이라는 인식도 강력한 전쟁 억제력이 될 것으로 본다."
<bmbmb@joongang.co.kr>
사진=김춘식 기자 <cyjbj@joongang.co.kr>

*** 제롬 글렌

유엔의 후원 아래 인류의 미래 청사진을 제시하는 싱크탱크로 1996년 창설된 '밀레니엄 프로젝트'의 대표. 미래사회의 도전과 기회를 미리 예측하고 이에 대비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밀레니엄 프로젝트'가 97년부터 매년 발간하고 있는 유엔 '미래보고서(State of the Future)'는 미래 연구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보고서로 평가받고 있다. 지금까지 50여 개국 1500명의 미래 전문가와 학자가 연구에 참여했다. 글렌은 30여년간 정치.교육.산업.국방.과학.우주 분야의 미래 연구에 천착하면서 각국 정부와 국제기구 및 민간 기업의 컨설턴트로 활동해 왔다. 미 중앙정보국(CIA)이 발간한 'CIA 2020 보고서' 작성에도 참여했다.

*** 티모시 맥

지난해 세계미래학회(WFS) 회장으로 선출됐다. 인구통계학적 분석과 트렌드 분석, 시나리오 기법 등 다양한 방법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분야의 대표적 모임인 WFS는 1966년 미 워싱턴에서 비영리 민간 교육.과학기구로 창설됐다. '미래는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슬로건을 갖고 있다. 한국 등 전 세계 80개국에 2만5000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있다. WFS가 발간하는 미래 예측 전문 계간지인 '퓨처스 리서치 쿼털리(Futures Research Quarterly)'의 편집국장을 지낸 맥은 변호사 출신으로 공공정책과 관련한 여러 비영리 단체의 법률 고문으로도 활동해 왔다. 국방부 등 미 정부 부처의 미래전략 수립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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