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과학과 미래] 과학으로 푸는 '역사 미스터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17면

과연 백제가 고대왕국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언제인가.

현재 고교 국사 교과서에는 8대 임금인 3세기 고이왕 때라고 돼 있다. 중국의 역사책인 '삼국지'의 '위지동이전'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최근 서울 풍납토성에 대한 과학적 조사가 백제의 고대왕국 성립 시기에 대해 논란거리를 던졌다.

풍납토성은 두께 50~60m, 높이 15m로, 둘러 싸인 면적이 26만평이다. 고대왕국 이전의 작은 사회에서는 이렇게 큰 성을 만들기 힘들다는데 학자들은 의견을 같이한다.

그런데 최근 토성 내 주거지의 유품을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의 것임이 드러났다. '삼국지'의'위지동이전'과는 맞지 않고, 백제가 기원전 1세기에 세워졌다는 '삼국사기'의 내용을 뒷받침하는 증거인 것이다.

한양대 배기동(문화인류학) 교수는 "워낙 3세기 설이 굳어져 방사성 동위원소 조사를 믿지 않는 학자도 있다"며 "그러나 과학이 강력한 증거를 제시해 학계에 엄청난 논란이 일고 있다"고 말했다.

과학이 역사를 바꾸고 있다. 고고학.역사학에 과학과 정밀 측정기술이 이용되면서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고 기존의 학설이 바뀌고 있는 것.

최근에는 중남미의 마야문명이 10세기께 갑자기 사라진 원인도 밝혀졌다. 9세기부터 50년 간격으로 찾아온 세번의 극심한 가뭄 때문이라는 것이다. 역사학자가 아니라 스위스와 미국의 지질학자.화학자들의 연구다. 이는 지난달 미국의 과학잡지 '사이언스'에 실렸다.

이들은 마야문명이 융성했던 멕시코 유카탄 반도 근처의 바다 퇴적물을 조사했다. 이 지역은 강수량과 바람 방향의 특성 때문에 건조기에는 퇴적물에 티타늄(Ti) 성분이 줄어든다.

연구팀은 최신 분석기술을 활용해 퇴적층을 머리카락 굵기의 절반인 0.05㎜ 두께로 나눠 티타늄 함량을 조사했다. 이를 통해 서기 8백10.8백60.9백10년에 지독한 가뭄이 3~6년 계속됐음을 밝혔다.

연구팀은 논문에서 "8세기 후반부터 전반적으로 건조했다"며 "그런 가운데 찾아온 몇차례의 강한 가뭄이 마야를 결국 멸망시켰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동안은 마야가 거대한 신전 등을 남기고 갑자기 사라진 것이 전염병 또는 내란 때문이었다는 등 학설이 분분했다.

또다른 고대 기후 변화 분석은 기원전 5천5백년께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에서 대홍수가 있었음을 알아냈다. 터키 북쪽의 흑해는 지금 지중해와 연결된 바다다.

그러나 먼 옛날에는 바다에서 떨어진 민물 호수였다. 지중해와의 사이에는 두꺼운 자연의 둑이 가로막고 있었다. 호수 주변에는 풍부한 물을 이용해 농사를 지으려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기원전 5천8백년경부터 날씨가 따뜻해지며 북극해의 얼음이 녹아 해수면이 점점 올라갔다. 지금의 흑해를 보호하던 제방에 지중해가 미치는 수압도 덩달아 커졌다.

기원전 5천5백년께 마침내 둑이 무너지고 흑해는 바다가 됐다. 이는 기후 변화와 흑해 주변 퇴적층 조사로 알아낸 결과다.

여기에 더해 2000년 미국의 탐사팀은 흑해 수심 1백m 지점에서 주거지 유적을 발견했다. 많은 사람이 당시의 홍수로 물에 잠겼던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호수가 짠물이 돼 농사를 지을 수 없어 전세계로 퍼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학자들은 세계 각지의 홍수 이야기가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기록상 가장 오래된 홍수 설화인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 이야기'나,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도 사실은 흑해의 홍수 이야기가 구전되다 기록됐다는 것이다.

해부학이 발달하며 미라에서도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독일 법의학연구소의 발라바노바 박사는 3천년전 이집트 미라의 머리카락을 분석했다. 마약 사용여부를 밝혀내는 것과 같은 조사였다.

발라바노바 박사는 3천년전 미라의 머리카락에 담배 성분인 니코틴이 상당히 들어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담배는 아메리카에서만 있었고, 16세기 유럽인들이 처음 아메리카 밖으로 가져갔다는 게 정설이었다.

그래서 3천년전 이집트 미라의 니코틴은 학계에 수수께끼를 던졌다. 극단적으로 이미 3천년전 이집트가 남미와 교역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럴리가 없다는 측은 감자.피망.가지를 많이 먹어도 니코틴이 머리카락에 쌓일 수 있다고 했다. 결론은 아직 내리지 못하는 상황이다.

DNA도 역사를 밝히는 데 한몫한다. 사람 세포 속에는 '미토콘드리아'라는 것이 있고, 그 유전자에는 혈통에 대한 정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어느 민족이 어디서 갈려나왔는지 규명하는 민족 계통도를 만들 때 미토콘드리아를 분석한다.

바로 이 방법으로 남태평양 주민들의 기원이 밝혀졌다. 과거 남태평양 주민들에 대해서는 남미 대륙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남미 기원설이 받아들여졌다.

노르웨이의 인류학자 토르 헤이에르달은 뗏목 '콘티키호'를 만들어 남미에서 남태평양의 섬까지 항해함으로써 남미 기원설을 굳혔다.

그러나 1990년대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브라이언 사이키스(분자의학과) 교수가 동남아.남미.남태평양 주민들의 미토콘드리아를 분석해 이같은 학설을 완전히 뒤집었다. 남태평양 주민들은 동남아에서 온 것이 확인됐다.

권혁주 기자

<사진설명>

上. 이집트에 못지 않은 거대 피라미드 등 화려한 유적을 남긴 마야문명은 10세기 들어 갑자기 종적을 감췄다. 그 이유는 고고학자가 아니라 지구과학자와 화학자들에 의해 최근 밝혀졌다.

下. 박물관의 유물 모양과 크기를 레이저로 정밀측정하는 모습. 과거에는 자로 재 일일이 손으로 그렸으나 이제는 특수기기가 레이저로 측정한 데이터를 갖고 컴퓨터가 알아서 3차원 입체 영상을 만든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고고학 연구의 도구도 이렇게 바뀌고 있다. [다인디지털 제공]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