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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어를 통해본 "사회사 16년"|한마디 말에 『세태』가 그대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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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경제> 경제의 자립에 대해 눈을 뜨고 이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 것은 60년대 초, 경제개발5개년 계획이 시작되고부터다.
5·16군사혁명정부는 민주당정권때 골간이 마련된 제1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 (62∼66년)을 확정, 「정부주도」의 야심적인 성장정책을 추진했다.
우리나라 경제사상 처음 보는 경제계획의 장이 열려 내년에는 제5차 계획에 진입하게 된다.
그 동안 5개년 계획은 저렴한 노동력과 외자도입을 바탕으로 한 수출제일주의로 연 평균 8%의「고도성장」이라는 괄목할만한 성과를 낳았다.
그러나 확대와 성장정책의 이면에는 인플레의 고질화, 부문간 불균형의 심화등 부작용이 누적돼 나중에 값비싼 댓가를 치르게 된다.
이에 따라 60년 후반 70년대 초는「차관경제」로 특징지어진다. 정부는 차관이라면 가리지 않고 장려했다. l백% 통화증발을 일으키는「현금차관」도 OK였으니까.
너도나도 차관버스를 타려고 했다. 잘만하면 하루아침에 재벌의 열에 올라설 수 있었다.
차관업체중에는 「부실」기업이 속출, 83개 업체가 「은행관리」로 넘어가는 파란을 겪게됐다.
「성장정책」 은 국제수지의 악화로 한계에 차는 듯 했다.
그러나 그 무렵 월남전쟁이 격화돼 우리나라는 이른바 「월남특수」 의 행운(?)을 잡아 활로가 틔었다.
67년의 경우 월남특수에서 벌어들인 것은 전체 GNP의 4%를 차지했다. 월남붐을 타고 한진그룹이 탄생한다.
월남특수는 몇 년 후 중동건설진출에 있어 결정적인 노하우를 제공하게된다.
70년7월7일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73년1l월 호남고속도로가 준공되면서 우리국토는 「일일생활권」 으로 단축됐다.
8·3조치의 약조는 73년말「오일·쇼크」가 밀어닥치면서 무산되고 만다. 국제원유가격이 4배나 폭등, 세계경제를 냉각시킨 오일쇼크는 걷잡을 수 없는 외환위기와 물가폭등의 격랑
을 몰아왔다. 국제부도직전까지 가는 등 한동안 암담했다.
다행히도 수출이 증가하고 때마침「중동경기」를 만남으로써 월남특수에 이은 제2의 해외특수를 누리게 됐다.
상품수출도 급격히 증가했다.
그러나 쏟아져 들어오는 「중동달러」를 지혜롭게 관리하지 못한 탓으로 엄청난 부작용이 일어났다.
유입되는 달러는 그대로 통화증발을 일으키고 그 돈은 부동산으로 몰려 사상 볼 수 없는 「투기바람」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화폐발행고의 증가율이 77년 40·4%, 78년 44·3%.
집값·땅값이 미친듯이 오르고「복부인」 들의 행진이 극성을 이루었다.
급기야는 부동산투기 억제를 위한 8·8조치 (78년)를 취하게 됐다.
고도성장의 견인차는 수출. 그래서「수출제일주의」가 불문율로 확립됐다.
매월 대통령주재로 수출(무역)진흥확대회의가 열리고 이 자리에서 온갖 수출지원대책이 지시됐다.
수출제1주의를 타고 「신데렐라 기업인」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러나「율산파동」은 그 부작용중의 하나. 수출지원금융의 부조리가 곪아터진 것이다.
거액의 수출금융을 유용했다는 혐의로 율산그룹 대표가 구속되고 14개 계열기업, 8천여 직원이 「공중분해」 됐다 (76년4월).
금융「부실대출」과 관련해서 ll개 은행장이 경질되는 금융사상 최대의 파동을 겪게됐다.
고성장의 그늘에는 소득분배의 불균형이 커가고 있다.
79년8월 「YH사건」 등은 응어리졌던 근로자의 불만이 폭발한 불행한 사건이었다.
관주도의 개발정책은 70년대 말 이후 한계에 부닥쳤다.
더 이상 관이 간섭하고 주도하기엔 경제상황이 너무도 복잡해졌고 다원화됐음을 정부는 판단했다.
이에 따라 경제정책은 「민간주전」의 방향으로 선회했다.
「자유화」 「민영화」 란 말이 나타났다. 그것은 은행의 민영화와 가격결정의 자율화로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경제의 자율화. 그것은 시행착오20년만에 터득한 값비싼 진리다. <이재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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