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漢字, 세상을 말하다] 浪漫[낭만]

중앙일보

입력

낭(浪)은 파도다. 옛 자전(字典)은 ‘물이 바위에 부딪히고 바람을 만나 생기는 것(水激石遇風則浪)’이라 풀이했다. 격랑(激浪)·풍랑(風浪)이 파도의 용례다. 이삭 팬 보리나 밀은 바람을 받으면 물결처럼 일렁인다. 보리 물결을 맥랑(麥浪)이라 부른다. 그렇다고 맥랑이 실제 물결은 아니다. 실질 없이 허황됨을 일컫는 맹랑(孟浪)이 여기서 나왔다. 낭(浪)에는 ‘제멋대로’라는 방탕·방종의 뜻도 있다. 낭비(浪費)·방랑(放浪)에 쓰인다.

낭만(浪漫)은 본디 ‘제멋대로 하다’는 의미다. 송(宋)나라 소식(蘇軾)은 “근년에 불현듯 삶이 뜬구름 같음을 깨달았으니, 이제 오(吳)나라 일대를 내 멋대로 거닐겠다(年來轉覺此生浮, 又作三吳浪漫游)”라고 노래했다.

18세기 산업혁명이 시작되자 서구에서 이성(理性)에 반기를 든 예술사조가 등장했다. 로맨티시즘이다. 일본으로 전해져 낭만주의(浪漫主義)로 음역됐다. 중국의 문호 노신(魯迅)은 『이심집(二心集)』에서 “혁명은 특히 현실의 일이다. 각종 비천하고 수고로운 일이 필요하다. 시인의 상상처럼 결코 낭만(浪漫)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중국은 ‘뤄만디커(羅曼?克·라만체극)’라는 음차어도 만들었으나 낭만이 더 널리 쓰인다.

낭만적 도시로는 프랑스 파리와 이탈리아 로마가 유명하다. 한국 뒷골목의 변신도 뒤지지 않는다. 서울 가로수길을 시작으로 홍대앞과 상수동을 거쳐 연남동·서촌·경리단길에 젊은이들의 재기 발랄한 맛집과 아기자기한 공방(工房) 창업이 인기다. 월세 35만원에 10평(33㎡) 남짓한 식당을 개업한 지 3년 만에 자신의 이름을 건 골목을 만들어낸 28세 청년도 나왔다. 재개발의 고수인 대형 건설사도 할 수 없는 도시 개조다. 서울만이 아니다. 부산 청년들은 ‘부산포니아(부산+캘리포니아)’를 만들고 있다. 모두 낭만 청년의 힘이다.

고시(考試) 대신 문화를 택했던 인재들이 한류(韓流)의 불을 지폈다. 이제 취업 대신 창업으로 ‘끼’를 펼치는 젊은이들이 전세계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장강은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며 흐른다(長江後浪推前浪). 낭만은커녕 거짓 낭설(浪說)을 일삼는 정치인도 그렇게 밀려나야 할 물결 아닌가.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xiaoka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