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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400여년째 대를 이어 성심껏 가꾼|국내 최대의 팽나무 터널|북제주군 한림읍 명월리|잎사귀만 따도 혼나|마을이 잘 사는 건 나무 사랑한 덕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물 좋고 지세(지세)수려한 제주도 북제주군 한림읍 명월리.
몽고의 침략, 임진왜란 등 숱한 수난을 이겨낸 조상들의 의기심과 더불어 4백년을 고수m 마을나무 팽나무를 가꾸고 있는 전국 최대 팽나무군 보호마을이다.
명월리 마을 한복판을 흐르는 5백m의 명월천변은 하늘을 가리는 4백년 목은 거목 l백여 그루가 줄지은 팽나무 터널을 만들고있다.
나뭇가지를 꺾고 벌금을 마을에 내지 못하는 사람은 이 마을을 떠나야 했다.

<옛날엔 동수감>
4백 여전 마을이 생길 때부터 유생(유생)들이 모여 살고 선비들이 향약(향약)을 정해「동수감」을 두어 나뭇가지나 잎사귀 하나만 꺾어도 벌금을 물렸다. 요즘의 자연보호운동 같은 정신이었다. 때문에 지금도 이 마을 어린이들은 『나뭇가지 하나도 꺾어서는 안 된다』는 불문 을이 너나없이 몸에 배어있다.
1948년 제주도에 4·3 폭동 사건이 났을 때 이 마을 주민들은 인근 해안 마을인 한림읍 옹포리로 모두 소개됐다. 당시 공비 토벌에 나선 경찰은 도내 산간 마을의 고목이 폭도들의 은신처가 된다는 이유로 모두 베어버렸으나 명월리는 옹포리에 소개해 있던 주민들의 결사적인 반대에 부딪쳐 나무를 베지 못했다.
당시 명월리 주민들은 『조상들이 수 백년 가꾸어온 나무를 베어버리면 고향에 돌아갈 면목이 없기 때문에 소개지 에서 모두 죽을 수밖에 없다』고 버티었다.
지금 도내의 중산 중산간 마을에 고목이 울창한 곳은 명월리 뿐. 태풍과 홍수피해를 전혀 모르는 마을이기도 하다.
명월리 한복 판에 있는 명월대는 4백 여년전 설촌 당시부터 있었던 것으로 명월대 밑에는 돌다리(석굴)가있어 이곳에서 옛 선비들이 장기·바둑·시작을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명월천 계곡 일대의 울창한 고목사이에는·온갖 새가 서식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비옥한 농토를 일구어 여유 있는 생활을 하는 9백여 주민들의 부지런한 모습에서 마을의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다.
몽고(원)의 침략, 임진왜란 등 숱한 수난용 이겨냈던 이 마을 선인들의 강인한, 의지는 팽나무의 푸르름만큼이나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이 마을엔 이조 세조 25년(l592년)에 제주목사 이경록이 둘레1km 높이2·4m의 돌성(석성)을 쌓아 군??를 갖추는 등 임신왜란에 대비했으며 이조말기에는 수군 만호를 두어 왜적을 막도록 했었다.

<지방기념물로 지정>
이보다 앞서 고려 원종10년(l269년)에는 삼별초의 김포욱 장군이 삼별초 군을 이끌고 명월포로 들어와 마을 안팎으로 목성(목성)을 쌓아 몽고 군을 맞아 싸웠으며 이조 중종5년(l5l0년)에 제주목사 장림이 목성을 개축, 왜 침에 대비했었다.
『예로부터 나무를 사랑하고 정성껏 가꾸는 사람은 복이 저걸로 굴러 들어온다 하지요. 동네도 매 한가지라요』
이장 김관호씨(44)는 지금껏 역병 든 집 없고 재산 망한 집이 없다고 자랑이다.
명월리의 옛 이름은 좋은 물이 흐르는 마용이라는 뜻으로 「수류천리」.
예로부터 제주 십경중의 하나인 「굴림 추색」은 명월리에서 비롯된 것.
고등소채·감귤·축산으로 부촌을 이룩한 명월리 국민소득은 가구 당 2백 58만원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2백 60가구 가운데 50%인 1백 30가구가 감귤을 재배하고 집집마다 소가 1마리 이상씩 있다.
현재 지방기념물 19호로 지정되어있는 이 마을 팽나무는 최고 높이 20m, 9월에 접어들어 동그란 책과(핵과)는 흑갈색으로 익어가고 있다.

<400년 걸려 만든 팽나무터널>
전국 최대 팽나무 군서 지인 북제주군 한림읍 명월리 팽나무 터널마을 4백년의 의연한 수령은 옛 선조 들이 향약을 정해 요즘의 자연보호운동을 벌였기 때문이다.
글 진창욱 기자
사진 양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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