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광개토왕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그야말로 백년전쟁이다. 한일두나라 사학자들은 1880년 만주 길림에서 발견된 광개토왕비를 놓고 아직도 논쟁을 계속하고 있다.
무려1전5백수십년의풍겸을겪으며 지금은 이국만주벌판에 서있는6m남짓의 석비. 원래는 1천8백여자의 비문이 새겨져 있었지만 이젠 거의 마멸되다시피 했다. 바로그것이 논쟁의 실마리다.
일본 사학자들은 알듯모를듯한 한자 몇개를 놓고 이른바「남한경영세」을 펴고 있다.『왜가 백제와 신소를 격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70년대 한 재일한국 사학자는 문제의 몇글자 비문이 일본인들에 의해 고의로 조작되었다는 주장을 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광개토왕(고구려19대왕)비가 한농부에 의해 발견되었을 무렵, 한학에 밝던「사꼬」(주구경신)라는 일본군대위가 그 비문의 탁본을 뜨면서 일부내용을 그릇 옮겼다는 것이다. 그후 오늘까지 일본인들에 의해 복사된 50여종의탁본이 남아있지만 저마다 내용이 조금씩 다른것은 한층 그런의심을 돋워준다.
더구나『파백잔』의 「파」자는 원래 없던 글자라고 한다. 글자하나를 보태『백잔(제)을 격파했다』로 만들어버렸다.
일본군부는 그것을 숨기기 위해 나중엔 비석에 석회까지 발랐다는 것이다.
국내학자들의 연구 또한 진지하다. 문제의「파」자는「고」자로, 백제와 신나가 왜에 조공을 했다는 뜻의 「래」자는 「미」자의 의도적인 오속이라는 주장이다. 1천5백년을 두고 비바람에 무뎌진 글자들은 획하나의 차이로그런 미묘한 착오를 보여줄 수도 있을 것같다.
한 거진학자는 보다 대범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비문중에「왜자가 9자나 나오는 것으로 보아광개토왕 재위중에 왜가 한우도에 들어과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비문에 적힌 내용들이 찬자의 과장에 의해 허황할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몇가지 보사적인 내용들이 틀린것은 그것올 입증할만하다.
또 일본학자들의『왜가…신라왕을 신하로 삼았다』는 해석도『신라왕은 대왕(광개토)의 신민이 오니…』 로 풀이돼야 옳다는 한학자도 있다.
삭아서 아예 없어진 비문이많고 남은 글자마저도 분명치 않은 부분이 한둘이 아니다. 흡사「워드·퍼즐」의 빈칸올 채워넣는 작업이나 마찬가지의 일을사학자들은 해야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선입관에 좌우되어 공연히 잘못된 글자에 집착할 수도있다.「미」가「래」로보이듯이.
그러나 문체는 이 비가 지금은 중공치하에서 공개되지 않고있는데 있다. 최근 만주 길림생문물국을 방문했던 일인학자들은중공당국에 의해 곧 공개될 것이라는 언질을 받았다고 한다.
공개된다면 우리학자라고 제외되어야할 이유는 없다. 학문의 세계에, 더구나 요즘과 같이 개방적인 중공은 우리학자들에게도 기회를 주어야할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