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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 덕에 팔도구경" 얼마나 흐뭇한 정경인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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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방학을 이용해 자기집에 놀려오라는 친구의 편지를 받고 간단한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친구의 얼굴이 보고싶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춘향의 사랑이야기가 깃든 남원 땅이었기 때문이었다.
광한루와 오작교를 친구와 함께 거닐면서 너무나 순수하고 정석적이어서 요즘같이 살벌한 현대사회에서는 도무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을 되새겨보았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 서울행기차 안에서 나는 아름다운 모습의 노부부를 만났다.
조용하게, 아직도 수줍음이 남은 채로 곱게 늙은 아내에게 차창 밖의 풍경을 하나하나 안내하는 교회장로님 타입의 남편은 신혼부부 못지 않게 다정하고 아름다왔다. 건강한 정신으로 늙음을 방지하려는 그 멋진 교훈을 나는 이 노부부에게서 배웠다.
『육체적 만년은 정신적 청춘을 능가하지 못하는구나』하는 느낌과 더불어 청춘상 못지 않게 훌륭한 연인들로 돋보였다. 할아버지께 목적지가 어디신가고 묻자 할아버지는 엉뚱한 며느리 자랑부터 하신다.
『우리 며느리는 이렇게 늙은이를 잘 이해 한다오. 환갑기념으로 팔도강산을 여행하시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해서 며느리 덕분에 서울 딸집부터 간다오』하신다. 이 얼마나 구수한 정인가?
『할아버지, 이 열차 안에서 가장 아름답고 복되게 보이십니다』고 나는 선망어린 눈웃음을 보냈다. 그들은 늙음에서 보이는 쓸쓸함도 초라함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늙음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완숙미를 풍기고 있었다.
덜 선 젊음도 아니요, 나태와 안일에 빠진 중년도 아니요, 생을 엄숙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생에 대한 존엄한 태도를 몸에 지니고 계신 것 같았다.
친구들이 모이면 시어머니와 다투던 얘기가 나오기 일쑤다. 그럴때마다 나는 젊은이가 노인을 이해해 주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여성이 태어나지 않고 만들어지듯이 좋은 시어머니란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늙음」이라는 병을 앓고있는 부모님에게 따뜻한 이해와 사랑을 드린다면 고부간의 갈등 같은 것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곱게 늙은 노부부, 효성스런 아들·며느리 때문에 아름다운 여생을 보내고있는 그림 같은 노인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여러가지를 느꼈다. 여행이란 그래서 좋은 것인가 보다.
서울에 도착하면 친구에게 편지를 띄우리라.
바보스러울 정도로 고지식하게 정리를 지켰던 남원의 춘향이처럼 살아가자고 말이다. 미래의 암행어사가 될 남편을 위해 온갖 괴로움을 참는 그녀를 우리의 동지로 삼자고 말이다.<서울동대문구신설동>【강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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