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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대는 눈가림으로만|법정기준 거의미달…나무 그늘 구경 힘들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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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회사원 김인배씨(33)는 자신이 살고 있는 J 아파트를 가리켜 「콘크리트 수용소」라고 부른다. 어느곳을 둘러보아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회색 콘크리트 건물과 도로뿐.
각 건물 앞에는 손바닥만한 잔디밭이 있지만 그늘을 만들어 줄만한 나무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김씨는 셋방살이 5년만 에야 겨우 서민아파트 (17평짜리)를 마련했다. 그러나 내집마련의 기쁨은 오래 가질 못했다. 도대체 숨이 막혀 살기 어렵다는 것이다.
김씨는 복더위에 뙤약볕이 내려 쬐는 날이면 오히려 지난해까지 세 들어 살던 수유리집의 널찍한 앞뜰이 그리워진다고 했다.
신반포 H아파트 옆 1천5백평 가량의 빈터에는 배추·시금치등 갖가지 채소가 고층아파트를 울타리 삼아 푸릇푸릇 자라고 있다.
잠원동 노인정 할머니분회가 만든「도심의 농장」이다.
할머니들은 이른 새벽부터 밭에 나가면 하루종일 밭에서 산다.
진딧물 약을 뿌리던 최백순 할머니(74)는 『밭에 서면 시골집 텃밭에서 일하는 듯 즐겁다』며 『저녁이 되어 돌아갈 아파트 숲을 바라다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고 한다.
아파트 단지의 주거환경은 삭막학기만하다.
거대한 회색 콘크리트 건물이 빽빽이 들어서있을뿐 숨통을 돌릴만한 녹지공간은 찾아보기 어렵다.
손바닥만한 잔디밭에 가느다란 나무 몇 그루가 띄엄띄엄 심어져 있을 뿐 온통 회색 콘크리트로 둘러싸여 있다. 그야말로 콘크리트 정글이다.
그래도 맨션아파트는 나은 편. 서민 아파트나 연립주택은 그나마 녹지대가 아예 없거나 눈가림에 불과한 곳이 수두룩하다.
주택건설촉진법 제30조에는 50가구 분양 이상의 아파트나 연립주택은 공지면적의 10%이상을 녹지대로 조성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 이 법시행령과 서울시 건축조례는 녹지대에 평당 높이 3m이상의 키 큰 나무를 한그루이상 심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대부분의 아파트들은 형식만 갖춰 규정을 살짝 비켜가거나 아예 이를 무시해버린 경우도 허다하다.
청량리동 M아파트의 경우, 녹지대는 그런 대로 법정기준인 2천평을 갖추고 있으나 키큰 나무는 법정기준 2천그루의 20%가량인 4백여그루의 수양버들이 군데군데 심어져 있을 뿐이다.
이 아파트주민 백모씨(50·여)는 『그나마 대부분이 최근 주민들이 낸 관리비로 심어진 것』이라고 한다.
여의도동 B아파트의 경우도 마찬가지. 2천6백여평의 대지 위에 3백여 가구가 사는 5층짜리 건물6동이 들어서 있으나 소나무 몇십 그루와 코스모스 몇 그루가 서 있을 뿐이다.
비단 이 아파트들만이 아니다. 어느 아파트를 둘러보아도 제대로 녹지대를 갖췄다고 한눈에 들어오는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일부 서민아파트나 연립주택은 더욱 심하다.
80여가구가 사는 봉천7동 N 연립주택은 아예 녹지대는 없고 각동사이에 너비1.2m쯤의 아스팔트통로만 나있을 뿐이다.
녹지대를 제대로 갖추려면 아파트 업자·감독관청·입주자들이 모두 노력할 수밖에 없다.
아파트업자들은 건물만 어느 정도 완공되면 녹지대는 제대로 모습도 갖추지 않은 채 분양하고있으며 감독관청도 녹지대까지는 채 감독의 눈길을 돌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입주자들도 그렇다. 건물의 구조나 시설에만 신경을 쓸 뿐 녹지대는 질 생활과 별 관련이 없다는 듯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경향이다.
아파트가 삭막한 것은 녹지대 부족에만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린이 놀이터·노인정·운동시설·유치원·학교등 부대복지 시설을 제대로 갖춘 아파트는 손꼽을 수 있을 정도다.
주택건설 기준에 관한 규칙(제33조)은 1백가구 이상의 아파트는 1백평을 기준으로 3가구당 1평씩을 더한 어린이 놀이터를 갖춰야 하며 3백가구 이상 아파트는 노인정을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나마 노인정 설치기준은 78년부터 적용되어 왔다. 이 때문에 대부분 어린이 놀이터는 갖추었으나 노인정이 있는 아파트 드문 실정. 시설을 갖췄어도 형식에 그친 것이 많아 아파트 주민들은 불편이 크다.
지난2월 대한주택공사가 서울·부산·대구등 대도시 아파트주민 1천1백94가구를 대상으로 실시한 만족도 조사에 따르면 어린이 놀이터 시설에 만족한 주민은 13.7%에 지나지 않았다.
또 노인정이 설치된 아파트의 노인들은 대부분(70%) 노인정이 비좁고 시설도 엉망이라고 불만을 나타냈다.
학교만 해도 그렇다. 서울시는 2∼3년전까지 구획정리 사업후에 남은 체비지를 비싼 값으로 아파트업자들에게 팔고 나서는 학교·공원부지를 확보해야 된다며 다시7만3천여평을 기부채납 받았다.
시가 해야할 공공용지학보를 아파트업자들에게 떠넘긴 것이다. 결국 아파트업자들은 이 부담을 입주민들에게 전가시켜 아파트 값을 울려놓는 셈이 됐다.
그렇게「빼앗은」부지마저 지금까지 학교가 들어서지 않고 빈터로 남아있는 곳이 적지 않다.
이 때문에 입주자들은 학교부지 땅값을 부담하고도 자녀들을 위험한 차도를 건너 먼 곳의 학교에 보내야 하는 실정이다.
회색 콘크리트로 뒤덮인 삭막한 아파트 단지-.
이유야 어디있든간에 그저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조그만 녹색공간이나마 제대로 갖춰주었으면 하는 것이 아파트 주민들의 한결같은 바램인 것이다.<이창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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