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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군 축내리 삼정부락|만5천 가락 4색 왕골로 청·황용이 춤추는 용문석를 엮는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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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완초피를 l만5천 개가 돗틀로 이어지면 청용·황용이 하늘로 오르고 쌍학이 너울너울 살아 춤춘다.
지열이 이글거리고 불볕이 쏟아 부어지는 한여름. 삼베고쟁이에 대청마루에 발을 치고 죽침을 베고 돗자리에 누워 들 건너 불어오는 산바람에 여름을 식히는 건 우리네의 슬기요 멋이었다.
보성읍과 벌교읍의 중간지점인 전남 보성군 조성면 축내리 삼정부락. 전국을 통틀어 단 한 군데뿐인 용문석 생산지다.
일제 때 막은 드넓은 간척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대나무·감나무·자두나무가 병풍을 두른 듯한 이 마을에서 어떻게 용문석이 시작되었는지 기록은 없다. 다만 촌로들의 구전을 통해 그 유래를 알아볼 뿐이다.
원래 축내리는 조선왕조 때부터 임씨들의 성 받이 마을로 조선조 5백년동안 진사급제이상만도 36명이었다.
지금도 마을 어귀에 「백천당」이란 문각이 남아있어 글 깨나 읊었던 사대부 촌이었음을 증명한다.
이 마을이 낳은 대표적 인물이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 병조판서까지 받았던 삼도 임계영.
그의 할아버지가 판서관산군을 받은 광세요, 아버지는 진사인 희중이었다. 또 그의 6형제 중 셋째 형 백영도 문과에 급제, 벼슬이 종2품에 이르러 궁중을 무상 출입했다는 것이다.
당시 궁중에는 중국 명나라에서 해마다 용문석을 선물로 보내왔는데 하루는 손조가 임백영에게 헌 자리 하나를 하사했다. 가문에서는 궁중석을 감히 깔 수는 없고 하여 가보로 전하게 되었다. 그 뒤 임백영의 증손자가 이 중국 용문석과 꼭같은 돗자리를 만들어 궁중에 진상함으로써 그 유래가 비롯됐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삼정부락 임씨 가문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납량예술품 용문석의 전승마을이 되어 80여 호 1백가구가 틈틈이 돗자리를 잇고있다.
용문석의 재료는 왕골(완초). 껍질을 가늘게 해서 너비1m 길이2m의 자리를 돗틀로 짠다.
길이2m의 자리를 짜기 위해 필요한 완피는 1만5천 개. 1만5천여 개의 완피를 하나하나 돗틀에 넣으면서 l만5천 번의 바디질(직조) 을 하는 힘겨운 수공이다.
자리가 짜여지고 나면 다음은 죽침으로 청·황·홍·흑 4색의 수를 놓는다. 황색은 주홍색에 가까우며 식물성 색료인 치자를 더운물로 우려서 염색하고 검정은 청·홍색을 혼합하여 염색한다.
돗자리 가운데다 여의주를 수놓고 오방호신으로 좌측에 청룡(동방청제장군) 우측에 황룡(중앙황제장군)이 승천하는 모습을 수놓는다.
또 예로부터 용은 밤에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오른다는 전설에 따라 용이 새져진 4각형 밖의 돗자리 가장자리에는 불가에서 구름을 뜻하는 「아」자를 수놓는다. 또 우주공간을 상징하기 의해 「아」 자선 주위에는 북두칠성이 반짝인다.
『청룡·황용이 여의주를 먼저 탐하려 몸트림하는 기상이 자리에서 엿보여야 제대로 놓인 수지요.』
이 마을 임씨 가문의 16대손 임환성 씨(50·기능보유자)는 용문석 한 장을 짜려면 1만5천 번의 바디질에 2만 번의 죽침놀림이 드는 몸살나는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
한편 용을 수놓지 않고 「수」 「복」을 좌우에, 「부귀강령」의 한문자를 상하에, 두 쌍의 학을 좌우에 배치한 흑문석은 사대부 집안에서 애용하던 고가품.
그 어느 것이고 한 장을 짜는데 10여 일을 꼬박 매달려야한다. 한 달이면 석장, 그 가운데서도 마음에 쏙 드는 건 1장 정도고 보면 1년이면 20여장 수작을 내기가 어렵단다.
용문석 한 장에 5만 원, 흑문석은 4만원을 받는다. 한 여름철 농번기엔 거의 생산을 못해 보성읍내 시장에서 좀처럼 구하기가 힘들다.
『지난번 국풍81제전에 특산품이라 해서 10장을 내놓았는데 알만한 분들이 힘들여 찾아와 5장을 사가더군요.』 임씨는 5장은 빗물을 먹어 그만 장을 파하고 돌아왔지만 역시 기계돗자리의 극성에 상품화 보단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라고 한다.
궁중의 진상품이던 용문석이 일반가정에도 보급되기 시작한 건 한일합방 후부터였다. 그러나 한때 이 마을의 촌장이 『돗자리 삼기가 천인들이나 하는 일이지 길게 하면 돈맛을 알고 학문을 잃기 쉽다』며 마을 돗틀 14대를 모두 모아 불태워 한 때는 단절의 위기도 있었다.
1백여 호 중 현재 꾸준히 돗자리를 내는 집은 40여 호. 돗자리로만 연간l백50여만 원의 소득을 올리지만 인건비와 재료비·수고비를 빼면 장사 속으로는 못할 일이란다.
『원래 책상물림들이 입은 재도, 행동은 뜬 법이지요. 우리도 진작 선전도 하고 솜씨 좋은 기능공도 많이 양성하고 판로도 개척했으면 수익이 훨씬 좋았을 것인데….』
임씨는 강화의 화문석보다 용문석은 아직도 숨어있는 촌색시 같다고 한다. <보성=고정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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