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타고난 천사표, 타고난 악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막장 드라마는 보통 가족의 위기로 시작한다. 가족의 위기는 곧 도덕의 위기, 패륜적 상황인데 그 패륜을 자행하는 이는 대부분 여성이다. 말하자면 ‘욕하면서 보는’ 막장 드라마는 악녀들의 패륜 열전인 셈이다. 악녀가 극악할수록, 또 패륜이 말 안 되게 심할수록 막장의 정도는 높아간다. 덩달아 시청률도 올라간다. 물론 결론은 악녀의 단죄, 도덕의 회복이다.

 비판이 많아도 그만큼 시청률이 높은 탓에 막장 드라마는 어느덧 한국 드라마의 하위 장르쯤으로 자리 잡았다. 본격 막장 드라마가 아니라 해도 ‘막장적’ 요소가 인기의 한 요소로 자리 잡은 것은 분명하다. ‘욕하면서 보는’ 막장 특유의 쾌감과 중독성 때문이다. 무엇보다 강한 스토리텔링이 한번 본 시청자를 놔주지 않는다.

 최근 시청률 30%대를 돌파하며 인기를 끄는 MBC 주말드라마 ‘왔다 장보리’도 막장이라면 빠지지 않는다. 얼굴에 점 하나 붙이니 딴 여자가 되더라는, 막장의 대표작 ‘아내의 유혹’ 김순옥 작가의 작품이다. 운명이 바뀐 채 살아가는 두 여자의 얘기다. 사고로 기억을 잃은 부잣집 딸(오연서)은 가난한 집안에 들어가 그 집 딸(이유리)과 자매로 자라고, 나중엔 이유리가 원래 오연서 자리에 양녀로 들어가는 얘기다. 특히 오연서의 운명을 가로챈 악녀 이유리의 맹활약이 화제다. 오직 부잣집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가난해진 애인을 걷어차는 건 기본이고 친엄마, 친딸에게까지 악행을 일삼는다. 한 치의 모성조차 찾을 길 없는 역대 최고 악녀다.

 그런데 사실 이 드라마에서 제일 흥미로운 것은 운명이 뒤바뀐 두 주인공의 설정이다. 원래 부잣집 딸인 오연서는 시골에서 일자무식으로 자랐지만 착한 심성에, 재능도 월등하다(두 주인공은 한복 명인 후계 자리를 놓고 경쟁한다). 심지어 이유리가 버린 딸을, 미혼모란 딱지를 감수하며 자기 딸로 키우기도 한다. 반면 가난한 집안 출신 이유리는 외국 유학까지 다녀왔으나 오연서의 실력을 따라잡지 못하고 백전백패다.

 ‘운명 바꾸기’ 모티브에서 종종 발견되는 이런 구도는 타고난 성품, 고귀한 핏줄은 못 속인다는 설정이다. 원래부터 귀한 것, 타고난 아름다움, 천부적인 재능, 좋은 혈통을 무엇도 못 이긴다는 얘기다. 막 자라도 원래 부잣집 딸은 착하고, 귀하게 커도 가난한 집 딸은 악독하다. 선악 구도까지 엇갈린다. 우리 마음속 저변 깊이 뿌리 박힌 혈통과 태생적 우월함에 대한 집착이다. 어쩜 신분사회의 흔적이다.

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부장대우

▶ [분수대]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