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짐스런 은행출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정부는 보다 많은 국민들의 은행이용률을 높이기 위해 새로운 예금제도를 실시한다고 한다. 즉 가계종합예금과 가계수표제가 그것이다.
현금을 보관하면 도난이나 화재의 위험은 물론 남을 불신하는 습관과 집을 함부로 비울 수 없는 불편 등 어려운 점이 적지 않다. 그러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금을 은행에 보관하기보다 안방 장롱깊이 간직하고 열쇠로 잠갔다 열었다 하며 꺼내 쓰길 좋아하고 안주머니 속에 바스락거리는 지폐의 촉감을 만끽하며 현금의 불안보다는 오히려 정신적 안정감을 얻는 것이다.
미국의 도둑들은 한국교포들만 노린다고 한다. 은행출입이 생활화하지 않고 현금을 좋아하는 우리 국민들이 겪는 불행이랄까.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선진국에서 거래하는 개인수표나 크레디트카드 같은 것으로 현금지불 수단을 바꾼다고 하니 바야흐로 신용사회의 문턱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현금 없는 백을 들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거리를 활보할 수 있다는 생각만도 즐겁다.
그런데 나에겐 돈을 맡기고 내 집 안방같이 출입해야할 은행에 대한 일종의 노이로제 증세가 있다. 은행에만 다녀오면『아차』하는 것이다. 현금과 수표를 동시에 찾아 올 경우 현금에만 신경을 쓰는 탓인지 수표를 어디다 둔지 몰라 쩔쩔 맨다. 또 은행창구에다 그냥 두고 온 것 같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은행으로 달려가기 직전 엉뚱한 주머니 속에서 찾기는 하지만 옆 사람들까지 놀라게 해서 핀잔을 받거나 놀림감이 된다.
며칠 전에는 송금해온 돈을 찾아 다시 일부를 송금할 일이 있었는데 무사히 일을 끝내고 다음 일을 보는 곳에서다.
『내 보따리는?』
그러면 그렇지 무사히 탈출(?)해 버리지 못한 것이다. 나중에 다시 가서 주민등록증 번호까지 적어놓고 내 보따리는 찾았지만.
15년 가까운 박봉생활에 은행문턱은 높기만 했다가 요즈음 들어 활짝 열어 놓은 은행문으로 출입은 하지만 덜 세련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10여년 전만 해도 은행은 참으로 생소한 곳이었다. 몇 십대일의 경쟁률을 뚫고 앉은 엘리트들의 흰 칼러셔츠나 용모 단정한 행원 아가씨들의 유니폼, 그리고 은행은 언제나 깨끗할 뿐 아니라 겨울은 훈훈하고 여름은 시원했다.
높다란 유리창구 저쪽에 품위 있게 앉아있는 은행원 앞에 손님은 서서 일을 보는데 정확히 기입해야할 숫자는 곧잘 지적을 받으며 왔다갔다 해야했다. 요즈음이야 냉난방장치쯤은 얼마든지 있고 은행문이 높은 곳은 아닌데.
얼마 전에 무슨 신용금고란 곳에 간 일이 있다. 나지막한 창구에 사무원과 고객은 다같이 의자에 앉아서 일을 보게끔 되어 있었다. 느긋한 자세로 앉아서 사무원과 이야기하는 사람을 봤다.
그 사람은 나처럼 실수 같은 것은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곳에서라면 얼떨결에 보따리도 못 챙기고 나오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제 은행에서도 지금까지보다는 좀 다른 분위기로 은행출입이 서툰 주부들에게 신경을 쓸 때가 온 것이다.

<서울 도봉구 공릉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