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결과 생명이 동가 일 수는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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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아침에 눈을 뜨면 여기저기서 자살 행위가 속출하는 것을 본다.
우리의 목숨은 그 영위에 있어서 물론 평안과 행운만이 계속 주어지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목숨의 고비 고비마다 숨막히는 고난과 눈물겨운 어려움과 참기 어려운 치욕조차 불허되지 않는 수가 많다.
목숨의 영위 그 선상에는 죽음과도 흡사한 고난의 세월도 함께 병존하고 있으며 우리는 때로 아슬아슬한 곡예와 같이 목숨의 위태로움을, 그 안위를 함께 겪으며 살고 있다.
우리의 긴 일생을 통해서 우리는 막을 수 없는 죽음의 순간들과 직면하는 운명의 격변을 전력을 다해 극복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 모든 순간들은 우리의 삶을 더욱 굳게 다져주는 목숨의 시련일 뿐 우리는 더욱 뜨겁고 강한 삶의 의미를 터득하게 된다.
스스로의 죽음은 패배이며 포기이며 굴복이며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종말이라고 죽음은 그 어떤 목적의 도구가 될 수 없다. 그것은 다만 일회성의 것이기에 더욱 소중하다.
생명의 계절은, 여름에는 더욱 무덥고 겨울에는 더욱 추운 법.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생명 그 자체의 운명적 조건 같은 것이다. 그것은 버리기보다는 잘 가꾸고 꽃 피우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다.
들에 피는 이름 모를 한 풀꽃도 아무런 간난 없이 꽃씨를 맺기에 이르르진 못할 것이다.
우리가 같은 조건의 질병을 얻었을 때 각자 개인의 인내심과 꼭 나으리라는, 병마를 이기는 확신을 가진 사람은 빨리 낫고, 처음부터 절망하고 마음에서부터 패배한 사람은 그만 쓰러지는 것과 같다.
평생을 한번의 시련도 겪지 않고 살아 왔다는 사람을 보았는가. 그는 아마 백치일 것이다. 느끼지 못했기에.
요즈음에 와서 목숨을 안이한 사고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쉽사리 죽음을 생각하고 마치 종이 한 장 뒤집듯 자살을 결행하는 풍조가 만연해가고 있다. 그러나 다시 그 종이를 뒤집는다고 해서 돌아오지 않는 것이 또한 목숨이란 것을 왜 모르는가.
죽음은 어떤 경우에도 복수의 방편이나 과시의 도구는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대한 침묵이기 때문에.
최근 50대의 소아병적 모성이 20대의 세 딸을 죽인 사실은, 아무리 그것이 정신질환에 의한 결과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가증스러움에 몸 떨지 않을 수 없다.
순결은 생명의 한 허상이지 목숨 그 자체와 동가의 것은 아니다. 더구나 그것을 물건처럼 싸서 보호하고 파수보며 지켜야 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치졸한 피해망상증이 세 딸을 오염시킨 나머지 저지른 모성의 횡포다. 세상에는 살신성인의 모성도 많았다.
그리 많이 배우지 못한 무기수의 아내가 20여년이나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면서도 유복녀를 훌륭히 키운 위대한 모성이 있고 아기를 업고 철길을 건너다 마주 오던 열차를 피해 아기만 안전하게 구하고 스스로는 그만 죽은 갸륵한 모성도 있었으며 6년간이나 지체부자유의 자식을 등에 업고 통학을 시킨 눈물겨운 감동을 안겨준 그런 모성도 있다.
남같이 배우지 못한 중에서도 그런 우직한 대로 본능적인 모성은 발휘되거늘 하물며 배울 만큼 배운 인텔리가 저지른 그 독기 어린 병적 폐쇄성이 저주스럽기까지 하다.
우리들의 상처와 과오에는 통회와 용서의 방편이 있고 또 간구 함으로써 얻는 재생의 길도 있다. 죽음보다는 삶의 힘이 더욱 강하다. 그리고 죽음은 결코 증오의 방법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그 누구와도 의논되지 않은 나름대로의 고독과 단절의 벽을 뚫고 녹여줄 보다 따스하고 막강하고 영향력 있는 힘이 그렇게도 없었단 말인가. 이 세상에는. 그 꽉 막힌 하늘 한 구석을 바늘 끝만큼의 온기로 뚫고 뾰족이 내미는 햇살처럼 삶의 기쁨의 맛을 보여줄 그 어떤 손도 정말 없었단 말인가. 연민스러움을 금할 길 없다.

<필자 약력>
▲1939년 경남 진주 출생 ▲숙명여대 국문과 졸업 ▲1962년 현대 문학 데뷔 (시) ▲저서 시집 『겨울 방직』『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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