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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유 감산 갈등…OPEC 쪼개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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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이번주 중 예정된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긴급 회동을 앞두고 회원국들 간에 원유 감산 여부에 대한 치열한 찬반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라크의 석유 생산 재개를 앞두고 유가의 급락을 감산을 통해 사전에 방지해야 한다는 의견과 시기상조라는 입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 석유 업계 일각에서는 "이라크 전쟁을 전후해 급속히 확산하고 있는 '미국의 OPEC 붕괴 시나리오'가 이미 실현 단계에 들어섰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 노출되는 회원국 간 갈등=OPEC는 당초 6월 11일로 예정된 총회 일정을 대폭 앞당겨 오는 24일에 긴급 회의를 열고 앞으로 이라크 석유 수출 재개에 따른 가격 유지 문제를 논의할 계획이다. 이번 회의에서는 현재 하루 2천4백50만배럴인 원유 생산량을 2백만배럴 정도 줄이는 문제가 중점 논의될 것으로 알려졌다. 원유 비수기인 2분기에 들어선 데다 이라크전의 종전으로 공급부족에 대한 우려가 사라져 유가가 급락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의가 시작되기도 전에 감산에 대한 의견이 회원국들 사이에 엇갈리고 있다. 알 아티야 OPEC 의장은 20일 경제 전문 통신인 AFX와의 회견에서 "현재 국제 원유시장에 흘러들고 있는 하루 2백만배럴의 초과 공급 물량을 해소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밝혀 감산결의를 이끌어내겠다는 뜻을 강력히 시사했다. 당장 인도네시아는 이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OPEC 회원국 가운데 사우디아라비아 다음으로 원유를 많이 생산하고 있는 이란은 '시기상조론'을 들어 감산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있다. 아랍에미리트도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라크의 석유 수출 재개가 언제 이루어질지 아직 불투명한 상황에서 미리부터 감산조치를 취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알제리 등 다른 회원국들은 중립적인 입장으로 아직 감산에 대한 의견을 표하지 않았다.

베네수엘라의 경우 국내 관계 부처끼리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루이스 비에르마 베네수엘라 석유부 부장관은 20일 "감산조치가 필요하다"고 밝힌 반면 아레발로 멘데스 로메로 외무부 차관은 "지난해 이후 파업에 따른 수출 부족분을 보상하기 위해서는 할당량의 확대가 절실하다"고 주장했다.

석유시장 전문가들은 석유 생산을 둘러싼 회원국들의 갈등은 이라크 전쟁을 전후로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고 지적했다. OPEC의 고위 관계자는 "일부 회원국이 생산 쿼터를 속이고 있다"며 "엄격한 쿼터 준수가 요망된다"고 밝혔다.

◇OPEC 붕괴 시나리오 실현되나=이라크전 이전부터 전문가들은 미국의 전후 OPEC 붕괴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는 시나리오는 전후 친미 정권 수립→이라크의 석유 민영화 및 석유 증산→이라크 OPEC 탈퇴→유가 급락→OPEC의 가격 결정 기능 상실 등의 수순을 거치는 것이다.

이런 관측은 이미 가시화되고 있다. 미국은 9.11 테러 이후 꾸준히 'OPEC 약화'전략을 추구해 왔다.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이 지난해 여름 비(非)OPEC 국가인 가봉과 앙골라를 방문한 데 이어 OPEC 가맹국인 이란을 통하지 않고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서 터키의 제이한까지 석유를 보내는 파이프라인인 'BTC'의 건설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런던의 국제에너지연구센터(CSEG)는 최근 보고서에서 "이라크 석유산업이 민영화되면 OPEC는 붕괴된다"며 이라크의 석유 수출 재개에 앞서 OPEC의 내분이 심화될 것으로 예견했다.

이 연구소는 이라크가 현재 2백만배럴 수준인 석유 생산량을 6백만~8백만배럴 수준으로 늘릴 경우 국제유가는 현재의 배럴당 30달러 안팎에서 14~18달러 선으로 떨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야마니 전 사우디 석유상의 경우 "이라크가 생산량을 늘릴 경우 배럴당 10달러선이 무너질 것"이란 전망을 내놨다.

◇OPEC는=OPEC는 1960년 바그다드에서 이라크.사우디아라비아.이란 등 5개국에 의해 결성됐다. 70년대 자원민족주의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라크 등 아랍 산유국들은 석유사업을 국영화해 석유 이권과 가격결정권을 미국.영국 등의 석유 메이저로부터 되찾았다. OPEC 출범 이후 세계 석유시장은 OPEC와 석유 메이저의 두 축에 의해 주도돼 왔다.

그러나 70년대 이후 북해 등 비OPEC 지역의 유전 개발이 활발해지면서 상대적으로 OPEC의 생산 비중은 축소됐다. 목표 유가 관리를 위한 OPEC의 산유량 제한제도가 비OPEC 공급물량 확대로 가격 유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0년 이후 OPEC의 위축 현상은 주요국들의 석유 소비 둔화와 더불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임봉수 기자

<사진설명>
OPEC 회원국들이 지난 10일 파리에서 회의를 열었다. 왼쪽부터 알바로 실바 칼데론 OPEC 사무총장, 샤키브 헬릴 알제리 에너지 장관, 압둘라 빈 하마드 카타르 에너지 장관. 압둘라 장관은 이날 세계 원유시장에서 하루 2백만배럴 이상의 원유가 초과 공급되고 있다고 주장했다.[A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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