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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Big Questions'] '부분은 전체보다 작다'를 증명할 수 없는 무한의 세계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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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무한으로 작아지는 도형들로 나눠지는 원형 공간. 네덜란드 작가 M.C. 에셔(M.C. Escher)의 1958년 작품 ‘서클 리미트 I(Circle Limit I)’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엄혹하고 잔혹한, 셀 수 없는 아카이아 인의 목숨을 가져간 분노를.”

고대 그리스의 시인인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스’의 첫 문장.

고대 그리스(아카이아) 최고의 영웅 아킬레우스.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었던 그의 분노. 마치 성난 짐승같이, 날카로운 창을 휘두르며 누군가의 아들이자 남편이자 아버지의 목숨을 가져가던 아킬레우스. 영화 ‘트로이’에서의 브래트 피트를 기억해보자. 아니, 차라리 적군의 방어선 뒤에 ‘던져져’ 마치 신들린 것 같이 싸웠다는 바이킹 특전사 ‘베르세커(Berserker)’들을 상상해보면 되겠다.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제논(Zenon·기원전 490∼430년)은 상상해 본다. 만약 아킬레우스가 거북이와 경주를 한다면? 말도 안 된다! 그리스 최고의 영웅과 느려터지기로 유명한 거북이와의 경주라니? 꼭 해야 한다면, 거북이에게 넉넉하게 한 100m 앞에서 먼저 ‘달리라’고 하면 되겠다. 화살보다 빠른 아킬레우스님과 경주하며 겨우 100m 앞이라니! 아킬레우스는 눈 깜작 할 사이에 100m를 달려 거북이가 있던 위치에 도착한다. 그리고 같은 시간 역시 열심히 달리던 거북이는 1m 정도 더 앞으로 나가있다. 뭐 1m 정도야….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킬레우스가 다시 1m를 달리는 동안 거북이는 1㎝ 앞으로 나간다. 또 다시 아킬레우스가 1㎝를 달리면, 0.1㎜ 앞에 서있고, 다시 0.1㎜를 달리면, 0.001㎜ 앞에 서있는 거북이.

거북이는 아킬레우스가 쏜 화살에 맞을까?
제논은 주장한다. 무한으로 점점 더 가까워질 수는 있겠지만, 아킬레우스는 거북이를 절대 추월할 수 없다고. 그렇다면 만약 거북이를 추월하지 못해 자존심이 상한 아킬레우스가 다시 시작된 경주에서 100m 앞 거북이에게 화살을 쏜다면? 100m를 날아가기 위해 화살은 물론 우선 50m를 날아야 한다. 50m를 날기 위해선 당연히 25m를 날아야 하고. 25m를 날기 위해선 25m의 반, 그리고 반에 반, 그리고 반에 반에 반, 그리고 반에 반에 반에 반…을 날아야 한다. 시작은 언제나 그 전 것의 끝에서부터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을 무한으로 나눌 수 있다면, ‘마지막’이란 의미의 끝이 존재하지 않고, 끝 없이는 그 다음 것의 시작도 불가능하다. 고로 화살은 결국 쏜 자리에서 한 치도 움직일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 나, 제논이 누구였던가! 존재는 결국 하나이며, 없는 것은 없고, 변화는 무지한 인간의 착각일 뿐이라고 주장하셨던 나의 사부님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의 최고 제자 아니었던가!

변화의 기본은 운동이다. 거북이조차 추월할 수 없는 아킬레우스, 그리고 쏜 자리를 떠날 수 없는 화살. ‘움직임은 불가능하다’를 나, 제논은 이렇게 증명한다!

그리스어로 개, 즉 키니코이(kynikoi)같이 떠돌이 인생을 산다 해서 키니코스라 불리던 학파의 대표 철학자 디오게네스(기원전 412∼323년). 움직임은 불가능하다는 제논의 ‘증명’을 알게 된 그는 벌떡 일어나 동네 한 바퀴를 돌아다녀 주었다고 한다. 현실과 도저히 일치하지 않는 제논의 주장. 그를 비웃긴 쉽다. 하지만 제논의 ‘증명’을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는 없을까? 심플리키오스,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 아르키메데스 등이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해 봤지만, 모두 실패하고 만다. 제논의 패러독스(Paradox· 역설)는 19세기 초에 만들어진 바이어스트라스(Karl Weierstrass)와 코시(Augustin-Louis Cauchy)의 엡실론-델타(고등학교에서 배운 epsilon-delta 규칙을 기억해보자!) 미적분을 통해서야 드디어 수학적으로 만족스런 수준으로 풀 수 있게 된다. 함수의 극한을 응용하면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추월하는 순간을 논리적으로 엄격하게 명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제논이 제시한 문제의 핵심은 ‘반에 반에 반에 반…’이란, ‘공간을 무한으로 나눌 수 있다’는 가설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추상적인 미적분(微積分)적 공간이 아닌, 우리가 만지고 보고 들을 수 있는 실질적 공간 역시 무한으로 나눌 수 있을까?

독일의 수학자 헤르만 베일(Herman Weyl, 1885∼1955년)은 물리적 우주는 연속적이지 않으며 플랑크 시간(Planck time, 5.39106×10-44초)과 플랑크 길이(Planck length, 1.616199×10-35m)란 마치 작은 ‘레고 블럭’ 같이 분리된 기본단위로 나눠진다고 주장했다.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추월할 수 있는 진짜 이유는, ‘무한’보다 절대적으로 작은 숫자의 공간적 ‘레고 블럭’들만을 정해진 시간에 따라잡으면 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무한이란 과연 존재할까?
그렇다면 ‘무한(無限)’이란 과연 존재할까? 우선 가장 간단한 자연수 또는 정수 {…-3, -2, -1, 0, 1, 2, 3…}를 생각해보자. 정수는 몇 개나 있을까? 물론 무한이다. 아무리 큰 숫자라도 우리는 언제나 ‘하나’를 더 더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정수는 다양한 방법으로 나눌 수 있다. 2, 4, 6, 8 같은 짝수로도, 1, 3, 5, 7 같은 홀수로도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잠깐! 무언가 이상하다. 홀수, 짝수 역시 무한으로 계속 연장시킬 수 있지 않은가? 직관적으로 누구나 알고 있듯이 ‘부분’은 ‘전체’보다는 작아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정수의 한 부분인 ‘짝수’가 정수와 동일한 ‘무한’의 크기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

19세기 최고 수학자 중 한 명이던 독일의 게오르크 칸토어(Georg Cantor·1845∼1918년). 그는 무한의 세상을 이해하기로 결심한다. 칸토어는 현대 수학 기초의 바탕인 ‘집합론’을 정의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집합이란 무엇인가? 칸토어는 말한다. “집합(영어 set, 독어 Menge)이란 인지적 또는 지각적으로 나눠질 수 있는 것들을 합친 것이다”라고. 과일={사과, 바나나, 수박}, 동물={개, 고양이, 거북이}, 정수={……-3, -2, -1, 0, 1, 2, 3…}가 모두 집합의 예들이다.

그렇다면 ‘두 집합의 크기가 같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칸토어는 집합들 사이 ‘일대일 대응(bijection)’이 존재하면 두 집합의 크기가 같아 동일한 ‘기수(cardinality)’를 가진다고 제안한다. 예로 든 ‘과일’과 ‘동물’이란 집합들은 일대일 대응이 가능하기에(사과→개, 바나나→고양이, 수박→거북이), ‘3’이란 동일한 기수를 가진다.

하지만 정수의 기수는 무한이다. 더구나 무한의 홀수, 무한의 짝수, 무한의 유리수 모두 정수와 일대일 대응이 가능하다(그림 2). 칸토어는 그렇기에 무한의 정수와 일대일 대응이 가능한 모든 무한집합들의 크기를 ‘셀 수 있는 집합들’의 기수, 고로 ‘알레프-0(aleph-0)’이라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모든 무한의 집합들은 셀 수 있을까? 칸토어의 답은 ‘아니다’였다. 실수(real number)를 생각해 보자. 실수의 특징은 아무리 작은 숫자 역시 다시 무한으로 나눌 수 있다는 점이다. 우선 무한의 이진수(0과 1)들로만 만들어진 실수의 부분 집합을 생각해보자(그림 3). 칸토어는 ‘대각선 논증’을 통해 무한으로 확장 가능한 이진수들의 집합은 ‘셀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아무리 모든 무한의 이진수들을 순서대로 나열해 세 보려고 노력해도, 이 행렬 대각선에 자리 잡은 이진수들(그림 3의 빨간 숫자들)의 ‘반대수(0→1, 1→0; 그림 3의 파란 숫자들)’는 나열에 포함돼 있지 않다. 고로 무한의 이진수는 정수와 일대일 대응이 불가능하며, 무한의 이진수를 포함하고 있는 실수 역시 정수와 일대일 대응이 불가능한 ‘셀 수 없는 무한’이란 말이다. 칸토어는 셀 수 없는 무한의 기수를 ‘알레프-1’이라 부르고, 알레프-1은 알레프-0보다 절대적으로 더 큰 무한이란 사실을 증명한다. 우주엔 다양한 크기의 ‘무한’들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3000년 전 이야기인 ‘일리아스’가 주는 교훈
그런데 인간에게 무한의 세상은 금지된 구역이었을까? 19세기 수학의 대가인 프랑스의 앙리 프앙카레(Henri Poincare, 1854∼1912년)는 칸토어의 이론을 ‘지적(知的) 감염병’이라 불렀다. “자연수는 신이 만들었고, 나머지 모든 수는 단지 인간이 만들었을 뿐”이라고 주장하던 독일의 수학자 크로네커(Leopold Kronecker, 1823∼1891년)는 그를 ‘사기꾼’이라 부르며 베를린대학 교수 임명을 무산시키기도 했다. 깊은 우울증과 정신병에 빠진 칸토어는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다 결국 1918년 시골의 한 정신병원에서 숨진다. “알레프 수들을 초월한 절대 무한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셰익스피어는 사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년)의 익명(匿名)”이란 주장들을 일기책에 남긴 채 말이다.

아킬레우스의 창에 맞아 죽은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Hektor). 사랑하는 아들의 시체만이라도 찾기 위해 아들을 죽인 자의 발에 입을 맞추려는 트로이의 프리아모스 왕. 자신의 몸으로 만든 아들의 몸을 다시 자신이 묻어야 하는 아버지의 슬픔을 바라보며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서서히 사라진다.

존재에 대한 ‘셀 수 있는’ 무한의 분노를 갖고 태어났기에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는 ‘늑대(Homo homini lupus)’일 수밖에 없는 우리들. 하지만 인간에겐 ‘셀 수 없는 무한’의 ‘자비’란 희망 역시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에, 우리는 여전히 3000년 전 이야기인 ‘일리아스’에 귀를 열고 있는 지도 모른다.



김대식 독일 막스-플랑크 뇌과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미국 MIT와 일본 이화학연구소에서 박사후 과정을 거쳤다. 이후 보스턴대 부교수를 지낸 뒤 2009년 말 KAIST 전기 및 전자과 정교수로 부임했다. 뇌과학·인공지능·물리학뿐 아니라 르네상스 미술과 비잔틴 역사에도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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