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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전3기…집념의 정치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두 차례의 대통령선거의 고배 (65, 74년)를 들고 「만년 대통령후보」로 몰렸던「프랑스와·미테랑」「프랑스」제21대대통령은 35년간 정치를 해온 집념의 정치인이다.
이번 선거때도 두회당후보로 지명되기에 앞서 당의 젊은 기수「미셸·코카르」가 두차례의 낙선 책임을 물으면서 후보지명전에도전,한때 어려운 처지에 빠졌으나 이를 능숙하게 극복함으로써 당의 지명을 받는데 성공했다.
44년 「드골」장군의 1차정권때 전쟁포로후원회 사무총장으로 들어간 것이 정치입문의 시발이었지만 46년 「샤토시농」에서 하원의원에 선출되면서 본격적인 정치여정이 시작된 「미테랑」의 정치경력은 반백의 연륜만큼이나 복잡다양하다.
하원의원 당선후 상원의원·시장·주의회 의장등을 역임했고 「망데스」 수상내각의 내무상(54∼55년)을 맡아「프랑스」정치사상 최연소각료직의 기록을 세우는등「드골」의 제5공화국탄생이전까지 제4공화국에서무려 11차례나 각료직을 맡았다.
65년 좌파단일후보로 「드골」 대통령과 맞서 대통령선거에 나섰다가 이번처럼 결선투표까지 몰고가 낙선한뒤 71년 현재의 사회당창당을 추도, 당수로 뽑혔고, 74년 다시 사회당공산당연합전선의 단일후보로 나섰으나「지스카르」후보에게 1·6%라는 간발의 표차로 패했다. 넓은 이마, 꾹 다문 다부진 입매와는 대조적으로 어쩌면 우수에 차보이기까지하는 깊은 갈색 눈동자를가진「미테랑」은 1916년 코냑주명산지인「자르낙」의 노동자 집안에 4남3녀중 2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조제프· 미테랑」은 철도회사원· 중소기업노동자로 지방노조회장도 지낸 노동운동가. 「미테랑」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말그대로 나무하고 소를치면서 시골소년으로 자랐지만 「미테랑」은 시간만 나면 방문을 잠그고 독서에 열중한 문학소년이었다. 그는 특히「샤토브리앙」을 탐독했다.
단신으로 「파리」에 올라온것은 17세때. 그가 좋아하던「앙드레· 지드」 와 「앙드레·말로」를 만나기위해서였다.
파리에서 수학하며 법학사·문학사·정치학사 학르룰 딴「미테랑」은 정치에 입신하기 전엔 지방신문정치부장· 변호사로도 일했다.
2차대전이 발발하자 39년 군에 들어갔으나 곧「나치」 독일군의 포로가 됐다가 세번의 끈질긴 시도끝에 마침내 프로수용소를 탈주,레지스탕스에 가담하면서 좌익운동에도 앞장섰다. 전쟁중의 공로로「레종·도뇌르」와 철십자훈장을 받기도했다.
72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부회장에 선임되기도했던 「미테랑」은 두회당내 온건좌파다. 44년「다니엘」여사와 결혼, AFP통신 기자인 장남과「보르도」대학법학교수인 차남이 있다.
당대의 뒤어난 웅변가중의 한사람으로 꼽히며 대중연설· 의회연설때 특히 미사여구의 구사가 놀랍다는 평을 듣고있다.
여가있을때는 정구와 탁구를 즐기고 저서로는 『중공의 도전』(61년), 『함구적인 쿠데다』(64년), 『가능성으로서의 사회주의』(71년)등 다수가 있다.
한편 새 퍼스트레이디 「다니엘· 미테랑」여사 (53)는 남편과 함께 몇차례 선거유세에 참석하기는 했으나 일반국민들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채 사교생활이나 공식활동을 피하고 조용히 내조활동을 해왔다.
동부「프랑스」에서 사회주의자인 교수부부의딸로 태어난「다니엘」여사는 2차대전때 17세의 나이로 항독레지스탕스운동에 간호원으로서 참가했다가 당시「게슈타포」의 수배대상이었던「미테랑」과 만나 1944년10월 결혼했다.
「다니델」여사의 취미는 정원가꾸기와 책장정리며 「미테랑」당수와의 사이에 「장·크리스토프」(34) 「길베르」 (32)등 2명의 아들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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