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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의 거장 빅토르 코사코프스키

중앙일보

입력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말을 시작하는 류의 사람이었다. 거침이 없었지만 불편하진 않았다. 다큐멘터리의 거장 빅토르 코사코프스키(53)는 본능과 직관의 감독으로 불린다. 인위적인 것을 거부하고 기록자로서 찰나의 순간에 빚어지는 낯선 감성을 중시한다.

러시아 출신인 그는 데뷔작 ‘벨로프씨 가족들’로 1993년 암스테르담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장편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20년 동안 9편의 작품을 냈다. 다큐멘터리를 찍어달라는 푸틴의 요청을 거절한 일화로 유명하다. 25일 열린 EBS다큐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26일 서울 코리아나호텔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도 그다웠다. 일반적인 질문에 철학적으로 답했다. 동문서답같기도 하고 우문현답같기도 했다.

-본능에 따른 제작을 말해 왔다.

“우리가 어부라고 하자. 어떤 사람은 물고기를 많이 잡고, 어떤 사람은 적게 잡는다. 사람의 본능에 의지하는 것이지 지식과 능력때문이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50년 뒤 러시아 혁명을 내다봤다. 사회에 어떤 변화가 있을 지 미리 내다보는 사람이 예술가다.”

-그럼 영화를 심사할 때도 본능에 따를 것인가.

“중점을 두는 건 감독의 재능, 작품의 예술성과 독창성이다. 다큐엔 전통적으로 세 가지 가치가 있다. 독창성, 인간이든 동물이든 자연이든 흥미로운 캐릭터 그리고 잊히지 않는 스토리다. 하지만 이 세 가지로는 충분치 않다. 한국에 한강의 기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처럼 마술적인 기적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예측할 수 없고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방향으로 구현돼야 한다.”

그는 “이곳에 역동적인 에너지가 가득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재미있는 스토리들이 눈에 띈다”는 이야기를 툭툭 던졌다. 호기심이 가득했고, 눈빛이 반짝였다.

-당신의 작품들을 관객이 어떻게 봤으면 하나.

“작품을 찍을 때 내가 자연과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보면 신호가 온다. 본능에 따르는 이유다. 자연이 나에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준다. 나는 일종의 프로젝터다. 누군가 나에게 그런 능력과 영감을 주고 나는 그것을 그대로 내보낼 뿐이다.”

-촬영할 때의 판단은 어떤지 구체적으로 말해달라.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거나 미워한다고 하자. 그런 상태에서 다큐를 찍으면 제한된 색깔이 나올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면 다양한 색깔이 나올 수 있다. 나는 단순한 것보단 복잡한 것이 좋다. 찍으면서 나를 변화시키는 주제가 좋다. 촬영은 다가올 일에 대해 예측 불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답을 알고 있으면 재미가 없다.”

-픽션 영화는 안 찍었다. 찍을 생각이 있나.

“픽션에선 3가지 요소가 중요하다. 각본과 연기 그리고 연출·촬영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각본과 연기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는 이보다 복잡하다. 각본이 삶이나 신(神)이나 마찬가지다. 감독의 역할은 이를 각본처럼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다. 만약 내가 당신에 대해 찍는다고 치면 각본은 당신의 운명일 것이다. 당신의 삶이 변화하는 포인트를 짚어내는 게 나의 역할이다. 그게 나에게 가장 재미있다.”

이정봉 기자 mol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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