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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쿠데타」로 얼룩진 태국 정정 명분은 항상 "독재와 부패추방"|학생혁명후 민정실패 2차대전후만 5차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쿠데타군과 대결하기 위해 「프렘」수상 휘하의 군부대가 2일현재「방콕」부근으로 집결중이라는 소식을 듣는「방콕」시민들은 흥분하지도 않았고 거리표정도 평상시와 다름없었다.』 군사정변울 맞는 나라 사람들의 반응치고는 기이한 것같이 보이겠지만 태국사람들로서는 이상할게 별로 없는것 같다.
태국이 전제왕제를 허물고 입헌군주제를 표방하고 나선 1932년이래 이나라의 정치는 군부의 통제아래 있어왔고 늘 쿠데타로 정권이 바뀌어왔기 때문이다.
2차대전후 5차례의 군사정변을 겪은 태국국민들은 이번과 같은 무혈쿠데타를 지난 5년동안 두차례 겪은바 있다. 이나라가 얼마나 군의 입김아래 놓여있는가 하는것은 국왕이 임명하는 2백25명의 상원의원중 31명만이 민간인이고 나머지가 현역의 육·해·공3군과 경찰이라는 것으로도 쉽게 알수있다.'
태국에 민정경험이 있다면 73년10월 학생들의 유혈혁명에 의해 「타놈」정권이 물러선뒤의 3년간. 총선으로 군소정당들의 연립정권이 들어섰으나 당시의 경제·사회·문화적 여건으로 보아 서구식 민주주의를 단시일안에 정착시킨다는것은 힘든 일이었다.
3년간의 민정결과는 제3세계국가들의 전형적인 정치양상인 집권세력간의 분열, 좌·우파세력간의 테러, 사회적인 혼란이었다. 결국 이를 구실로 76년10월 다시 군부가 등장해 의사민정체제로 내각을 바꾸었다. 그러나 군부에 의해 임명된 판사출신의 「타닌」 수상이 각료안배 문제를 두고 군부와 대립, 1년만인 77년10월 쿠데타로 다시 물러났다.
이후 「크리앙사크」 군최고사령관이 수상으로서 정부를 이끌어왔으나 사회혼란·경제정책에대한 광범한 비판에 부딪쳐 80년3월 「프렘」장군에게 군최고사령관및 수장직을 넘겨주었다.
태국군사정변의 외형적 특징은 대체로 집권세력의 내분, 경제실정, 사회혼란등이 구실로 내세워진다는 점에 있는데 1일 실각한「프렘」내각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군최고사령관으로서 군부의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프렘」수상의 내각은 이미 지난2월 연립정당의 연정, 탈퇴로 위기를 맞았었다.
구실은 일부각료의 석유수입을 둘러싼 수회스캔들이 부각됐으나 모두 군부세력을 등에 업은 3개 주요 정파간의 암투때문이었다. 「프렘」 수상은 대폭 개각으로 일단 넘긴것 같았으나 결국 그의 전임자들과 같은 도전을 받고 있다.
이번 정변역시 표면적으로는 군의 제2인자가 늘 지도자가 돼왔던 전례에서 벗어나지않고 「프렘」 수상과 절친한 것으로 알려진「산트·치트파티마」육군부사령관이 새혁명위원회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번 정변을 추도한 배후세력은 육군내의 젊은 장교들로 구성된 진보세력으로 민족주의적 색채를 띤 입헌군주제 옹호자들이라고 알려졌다.
군부지도자들간에는 「새세대」로 알려진 이들은 혁명위원회를 실질적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이들중 가장 잘알려진 인물은 1일새벽 「캄보디아」와의 접경지역에서 군대를 이끌고 「방콕」으로 긴주한 제2보병사단장 「프라차크·스와르노치트」 대령이다.
또 혁명위원회의 제2인자인 「방콕」 주둔 제1사단정 「바신· 이아사랑쿨」장군과 혁명위 사무총장「마노· 투네카초른」 대령도 「새세대」 장교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제2사단장인 「프라차크」대령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40∼50대사이의 젊은 장교들이 태국이 당면한 문제들을 검토하기 위해 여러 위원회와 실무그룹을 조직, 활동해왔다고 밝힌바 있다.
이들이 내세운 명분이 태국국민들에게 낯선것들은 아니다.
『부패추방,폭리규제,범죄단속,전통적 가치관의 확립과 자신감의 회븍…』등 이런 지도자들의 약속과 다를바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주목할 점이 없는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종래의 정변이 일종의 군원로중심의 세습제처럼 돼왔던데 비해 이들은 앞으로 1인종심의 권력체제에서 벗어날 가능섬이 있다. 또 태국의 고질적인 사회의 부패·오직등이 이들의 청순한 의무감으로 순화되는 것도 기대해봄직하다.
그러나 패기에 찬 이들 소장장교들의 쿠데타가 성공한다고 가정하더라도 기대하는 것처럼 1932년 전제왕제타도 이래의 폐습이 당장 일소되리라고 보기는 힘들다.
태국역시 다른 제3세계국가들 처럼 대중에 의한 민주정치활동이 발전된 경험이 없었고 경제·사회적인 바탕이 빈약하기 때문이다.<김동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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