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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국의 옛 도읍서 우륵의 선율을 탄다-고령군 고령읍「가야금학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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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붓끝 같은 손가락이 가야금 열두 줄에 살포시 올려진다. 듣는 듯 퉁기는 듯 현을 타는 손놀림에 가야 5백년의 숨결이 살아난다.
부처님이 실법하던 영산회의 불보살을 노래한 『영산회상곡』. 굽이굽이 여울지는 가락따라 소녀의 얼굴엔 미소가 떠오른다. 석가가 내보인 꽃의 의미를 깨달았던 가섭(석가의 제자)의 「이심전심」의 미소다.
경북 고령군 고령읍은 옛 가야국의 고도. 이곳에 자리한 고령여자종합고등학교(교장 김세훈)는 전교생이 가야금을 탈줄 아는 가야금 학교다. 이 여학교가 가야금을 만든 악정 우륵의 고향에 있다는 게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가야화상의 구현」이 이학교의 교육지표. 1천5백여명의 재학생들이 가야금의 청아한 선율 속에서 여인의 맵시와 자세를 배우고있다.
이 학교에 가야금 「붐」이 일기 시작한 것은 전성순 교사(49)가 음악담당 교사로 부임한 74년부터였다. 한국신학대학을 졸업, 작곡가 나운영씨에게서 음악을 배운 전 교사는 20년을 가야금과 함께 살아왔다.
『문화적으로 빈곤한 시골환경과 시설 때문에 학생들이 음악을 너무 모르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궁리 끝에 악성 우륵을 낳은 이 지역의 전통을 살려 가야금을 가르치기로 했지요.』 지난달 설당중학교로 전출한 전 교사는 가야금교육의 동기를 이렇게 말했다. 처음엔 몇몇 학부형의 지원과 학교특별활동비를 쪼개서 가야금 8대를 마련, 음악시간마다 가야금의 이론과 연주실기를 가르쳤다.
일주일에 2시간씩 돌아오는 특별활동 시간엔 희망자가 너무 많아 제대로 줄 한번 퉁겨보기가 힘들었다.
본격적인 가야금교육이 실시된 것은 전임 이헌영 교장이 부임한 76년. 이 교장은 도 교위지원비 1백93만원과 육성회비 1백42만원 등으로 60대의 가야금을 마련했다.
『하루에도 대여섯 대씩 끊어지는 가야금 줄을 수리하느라 혼자서 밤을 밝히는 날이 많았지요.』
전 교사는 그보다 더 어려웠던게 「도·레·미」의 서양음계에 익숙해온 학생들의 귀에 우리고유의 「첨(레) 웅(솔) 둥(라) 당(레) 동(미)」음계를 이식시키는 일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가야금의 역사는 약1천3백년. 대가야의 마지막 임금 가실왕이 중국의 악기를 보고 우륵에게 명하여 원형을 발전시긴 것으로 청아한 음색과 가녀린 여운이 일품이다.
거문고가 남성적이라면 가야금은 여성적이다. 거문고는 장중하고 무거운 맛을 풍기는데 가야금은 부드럽고 아름다운 맛과 섬세한 여운을 남긴다.
가야금을 타는 기본자세는 바닥에 드리운 치마폭 속에 오른쪽 무릎을 땅에 붙이고 양반다리로 꼬고 앉은 뒤 가야금을 앉은 자세에서 15도 경사지게 눕혀야한다.
『오른쪽 새끼손가락을 현침에서 떼지 말고 식지의 둘째 마디에 엄지를 붙인 뒤 숟갈로 긁어내 듯 현을 뜯어야 합니다.』 전교사의 타 학교 전출로 후배를 지도하는 악장 김해란양(18)의 설명이다.
『손끝에서 피가 나고 고름이 솟아 몇번이고 군살이 박혀 손가락 끝으로 현을 타야 가야금의 제소리가 난다』는 조말숙양(17)은 손끝이 아리다고 골무를 끼는 것은 절대 허용되지 앉는다고 한다. 민요·영산회상곡산조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가야금 곡을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는 학생들은 79년 경북 학생음악경연대회에서 조경숙양(18) 등 4명이 출전, 특상을 모두 휩쓸었다.
2, 3학년생들의 합주는 남도지방 특유의 『가야금산조』. 느린 박자의 「진양조」에 「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단모리」로 넘어가는 60금 7백20현의 조화는 5백년 사직의 대가야의 하늘이 열리고 거기 일세를 풍미한 악성 우륵의 걸어간 발자취가 바람처럼 구름처럼 밀려온다.
신라장수 이사부에 의해 5백20년 가야역사의 종지부를 찍었던 진흥왕23년(서기562년).
조국이 패망한 후 우륵은 망국의 한을 가야금으로 달랬다. 우륵이 은거해서 말년을 보냈던 마을은 그가 가야금을 타면 온 마을에 「정 정궁」하는 웅장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해서 지금도 「정정골」이라고 부른다.
무아의 경지에 몰입한 듯 가야금의 선율 속에 파묻혀 「현」을 뜯는 소녀의 가슴속엔 조상들의 체온과 숨결을 느끼며 역사의 굴절을 배운다. <고령=김창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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