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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 125년 만에 독일인과 화해 유태계 시인 「하이네」복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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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로렐라인」의 시인 「하인리히·하이네」가 사후 1백25년만에 독일인들과 비로소 화해를 했다. 단지 유대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박해를 가해왔던 독일인들이 지난달17일 그의 서거 1백25주기를 맞아 「하이네」와 극적으로 화해, 서독뿐 아니라 전 세계 문단으로부터 환영을 받고 있다.
「하이네」의 출생지인 「뒤셀도르프」 그래서 지금 「하이네」기념제로 대성황이다.
「뒤셀도르프」가 자랑하는 「돼지시장」엔 「데드·마스크」를 조각한 「하이네」두상을 제막, 「하이네」기념제의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회와 효젭·퀴르텐」시장은 「뒤셀도르프」대학의 교명을 「하인리히·하이네」대학으로 개명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섰다. 뿐만 아니라 시공회당에서 열린 추모식엔 문인들은 물론, 「카르슈텐스」연방대통령 등 내노라하는 정객들까지 참석, 「하이네」의 문예적 복권(?)을 공식으로 뒷받침했다.
더욱 이 같은 「하이네」와의 화해는 「함부르크」시 참사회가 기념동상건립을 공식으로 채택함으로써 전국화될 움직임도 없지 않다.
유대인 출신에다가 「프러시아」개혁을 주장했다해서 모욕과 수난만을 받아온 「하이네」로선 실로 오랜만의 햇볕이 아닐 수 없다.
「청년독일파」시인으로 주옥같은 글을 남긴 「하이네」는 나이 불과 34세에 조국을 떠나 중년을 투병생활로 보낸 후 59세를 일기로 「파리」의 「몽마르트」언덕에서 숨져간 비극의 시인이다.
그러나 그의 비극은 사후에도 다를 바 없었다.
「파리」망명생활 중 이미 한차례 판매금지의 곤욕을 치른 그의 저서가 「히틀러」의 등장직후 분서라는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스」여왕이 그의 사후 31년 후인 1887년 「뒤셀도르프」에 동상건립을 제의했다가 일언지하에 거절당했으며, 「함부르크」에 세워진 「하이네」동상은 1933년 「나치」파에 의해 주물공장으로 끌려가는 등 온갖 비극을 다 겪어야 했다.
「파리」 「몽마르트」언덕에 「하이네」의 흉상이 세워졌고 「뉴욕」엔 「로렐라인」분수대가 건립되었으며, 「그리스」의 「코르푸」에는 「하이네」의 두상이 만들어진 것과는 달리 조국으로부터는 수난만을 받았을 뿐이다.
「하이네」의 비극이 막을 내림으로써 앞으로 그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로렐라이」개발에도 박차가 가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제 「하이네」와의 화해를 이룩한 독일인에게 「이반·골」과 「프란츠·베르펠」같은 나머지 유대계 문인과의 화해도 바람직하다는 견해가 서서히 일고 있다. 【본=이근량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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