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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다르게 베토벤 해석한 14세 임주희 ‘맹랑 피아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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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9호 24면

강렬한 음계였다. 16일 오후 서울 예술의전당. 서울시립교향악단, 지휘자 정명훈과 함께 무대에 선 14세 피아니스트 임주희는 베토벤 협주곡 3번 1악장의 도입부를 거대한 소리와 무게로 표현했다. 사실 이 선율은 단순하다. c 단조의 기본 음계 ‘도레미파솔라시도’다.

서울시향 유럽투어 프리뷰 콘서트, 16일 예술의전당

협주곡은 오케스트라 홀로 시작한다. 3분 이상 오케스트라만 연주하다가 피아노가 나온다. 베토벤은 오케스트라가 포르테시모(ffㆍ매우 크게)로 서주를 끝내도록 했다. 그리고 피아노가 포르테(fㆍ크게)로 되받으며 c 단조 음계를 연주한다. 소리가 한 단계 작아지는 것이다.

하지만 임주희의 첫 음계는 오케스트라를 압도할 만큼 큰 소리였다. 수많은 피아니스트가 이 곡을 연주ㆍ녹음했지만 이처럼 도발적으로 등장한 경우는 찾기 힘들다. 특히 이 작품은 베토벤의 ‘괴팍한’ 성향이 본격화하기 전의 음악이다. 규격화된 고전 양식의 틀 안에 아직 있고, 말하자면 얌전한 곡에 속한다.

하지만 임주희는 이 곡을 좀 더 자유롭게 봤던 모양이다. 시작 음계만이 아니었다. 오케스트라 없이 혼자 연주하는 카덴차 부분은 낭만주의 시대의 리스트ㆍ라흐마니노프를 방불케 했다. 그만큼 화려하고 장식적이었다. 무엇보다 소리의 박력이 줄어들지 않았다. 부드러운 선율을 강렬하게 살려냈고, 패시지마다 의미를 부여해 ‘센’ 음악을 만들었다. 카덴차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트릴은 마치 베토벤 말년의 피아노 소나타에서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3악장에서도 임주희는 자유롭게 내달렸다. 악보에는 첫 악장처럼 ‘알레그로(Allegroㆍ빠르게)’ 로 지시돼 있다. 경쾌한 느낌은 있지만 기품 있는 빠르기다. 하지만 임주희는 오케스트라보다 조금 빠른 호흡으로 노래했다.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음악을 주고 받는 과정에서 약간씩 속도가 당겨졌다. 힘이 넘치고 자유분방한 피아니스트가 오케스트라를 재촉하는 모양새였다. 급기야 맨 뒷부분은 ‘프레스토(Prestoㆍ매우 빠르게)’에 가까운 템포가 돼버렸다. 청중의 호흡이 가빠질 정도였다.

3악장은 사실 피아니스트가 장기 자랑을 하기 좋은 부분이다. 단순히 말해 음표가 매우 많다. 빠른 손놀림, 정확한 리듬감을 뽐낼 수 있다. 수많은 음표를 완벽하게 제어하는 순발력도 필요하다. 따라서 젊은 피아니스트가 유리하다. 재기 넘치는 14세 연주자로서는 신나게 연주할 수 있는 물을 만난 셈이다.

14세라면 잘 와닿지 않지만, 임주희는 2000년생으로 중학교 2학년 나이다. 현재 홈스쿨링을 하며 연주에 주력하고 있다. 피아노 학원 선생이던 어머니에게 3세에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6세부터 장형준 서울대 음대 교수를 사사했다. 전환점은 2010년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를 만났을 때다. 게르기예프는 지인에게 받은 연주 DVD를 보고 임주희를 백야 페스티벌 협연자로 발탁했다. 같은 해 두 번 더 협연자로 불렀다.

이처럼 임주희는 러시아 음악계 제왕의 지지를 받고 있다. 2012년 게르기예프는 런던 심포니와의 한국 공연에서 그를 깜짝 게스트로 초청해 예정에 없던 라벨 협주곡 1악장을 연주하기도 했다.

사실 이날 임주희의 연주는 완벽했다고 볼 수는 없다. 군데군데 실수도 있었다. 의욕이 앞서 음이 뭉개졌던 탓이다. 정통적이거나 세련된 해석도 아니었다. 요즘은 어려운 곡을 정확하게 연주하는 어린 피아니스트 숫자를 세기도 힘들 정도다.

그런데 왜 게르기예프, 정명훈과 같은 지휘자가 그녀를 낙점했을까. 바로 완벽이란 틀을 버렸기 때문이다. 흠잡을 데 없는 신동은 많다. 피아노 테크니션들이다. 그러나 개성을 탐색하는 꼬마 피아니스트의 숫자는 미지수다. 임주희는 그래서 독특했다. 어린 피아니스트가 선배들의 전례(前例)를 참고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표현했다는 점이 청신호다. 음악 패시지를 밀고 당겨보는 실험, 감정을 폭발시켰다가도 수그러뜨리는 조절 능력은 맹랑했다. 잘 치는 피아니스트를 넘어 좋은 음악가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임주희는 6월에야 베토벤 협주곡 3번의 악보를 처음 읽었다고 한다. 세 악장 악보를 보고 소화시킨 후 외워 무대에서 연주하는 데 고작 두 달이 들었다. 피아니스트로서 체격도 좋다. 알맹이 있는 소리로 몇 시간이고 무대를 이끌기 좋은 조건이다. 여러모로 스타성을 갖췄다.

현재 국내 젊은 피아니스트의 층은 두텁다. 20대 후반의 손열음(28)ㆍ김선욱(26), 이제 약관이 된 조성진(20)이 주는 각각의 무게감이 팽팽한 균형을 이룬다. 임주희는 몇 년 후 이들과 같은 수준의 무대에서 경쟁하게 될 것이다. 연주를 즐기는 타고난 ‘꾼’ 손열음, 모든 작품을 건축적으로 해체·조립하는 김선욱, 단번에 드러나는 독특한 개성을 가진 조성진 사이에서 임주희는 어떤 위치를 가지게 될까. 채워야할 빈칸이 많다. 그런 만큼 지켜보는 일 자체로 즐거우리라.

글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사진 서울시립 교향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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