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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 왕릉비 원형 발견|왕릉서 3km떨어진 고낭포 국교에 방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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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신라 천년 사직의 망국 한을 안고 고려 땅 (현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고낭포리)에 묻힌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원래의 능비가 발견, 확인됐다. 문공부 문화재 관리국은 9일 황수영·임창순 문화재 위원으로 구성된 조사단의 현지 답사를 통해 고낭포 국민학교 후편 정원에 방치돼 있은 경순 왕릉비의 비문 내용을 판독, 이 비가 고려말 건립된 최초의 경순 왕릉비였음을 확인했다.
대리석으로 된 비의 크기는 높이 1m15cm, 폭 65cm, 두께 16cm.
비문은 마모가 심해 전체내용을 파악하기는 어려웠지만 조사단은 『순·응·문·수·게·성』의 6자를 판독했다.
특히 「순」자 바로 앞의 글자가 확실치 않으나 「경」자로 읽을 수 있어 이 비가 경순 왕릉비라는 추정을 더욱 명백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비문의 글자체는 구양순체이며 비석의 형태는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비형식이었다.
지난 76년 새마을 사업 중 4H 구락부 안내판으로 사용하려는 것을 동네 노인들이 만류, 현 위치에 옮겨놓게 된 것인데 이 비가 있는 고낭포 국교는 왕릉으로부터 3km 지점이다.
현재 왕릉 앞에 세워져 있는 경순 왕비는 조선조 영조 23년 (1747년) 에 다시 세워진 것이라고 쓰여져 있어 원래의 비는 개립 당시 버려진 것으로 알려져 왔다.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고낭포 국교에 세워져 있는 경순 왕릉비는 6.25전쟁 후 미군들의 굴토 작업 중 왕릉으로부터 3백m 지점에서 발굴되었다는 것인데 그 동안 계속 방치돼오다가 최근 경기도 문화공보실의 확인 조사 요청에 따라 이번에 처음으로 고증 및 조사가 이루어졌다.
문화재 관리국은 판독된 비문의 글자와 과거 경순 왕릉 부근에 특수한 시설물이 없었다는 주민들의 증언 등으로 미루어 이 비가 경순 왕릉비임에 틀림없다고 보고 현 위치에 그대로 보존하도록 하는 동시에 소정의 절차를 거쳐 문화재로 지정할 예정이다.
현 위치 보존 이유는 왕릉의 위치가 휴전선 남방 한계선으로부터 3백m지점에 위치, 민간의 출입이 통제돼 있어 비를 능 역으로 옮기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
사적 제244호로 지정돼 있은 경순 왕릉은 재위 8년 (927∼935년) 만에 고려에 항복, 고려 태조 (왕건)로부터 유화궁을 하사 받고 그의 딸 낙랑공주를 아내로 맞는 한편 경주 사심관으로 임명됐다가 978년 승하한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이 묻힌 능이다.
경순왕이 고낭포에 묻힌 것은 그를 왕족으로 대우한 고려가 왕도인 송도 (개성)로부터 가까운 곳에 능을 모시려했기 때문이다.

<신라∼고려 사이 단절기 증언>
▲황수영 박사의 말=이번 경순 왕릉비의 발견 고증은 비록 비문이 많이 마모되었지만 고비의 발견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큰 수확이다. 특히 신라에서 고려로 이어진 역사의 한 단절기를 증언할 수 있는 경순 왕릉비는 고고학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역사적 의의도 매우 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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