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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51) 비규격의 떠돌이 인생(제72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L군이 묻는 대로 대충 얘기를 하고 부립병원으로 가던 길이라고 했더니, L군은 다짜고짜 진찰실로 나를 데려가서 제 아버지에게 동경서 신세를 입은 선생님이라면서 내 얘기를 옮겼다. 「핀세트」로 수포 하나를 따서 현미경으로 한참 들여다보고 나서 L의사는 『진성인데요』한다. 『피병원으로 가면 살 사람도 죽습니다. 어디 두어 달 숨어 계실 데가 없을까요?』
L의사는 그러면서 전시하의 격리병실이 얼마나 참담한가를 얘기해 주었다.
그 날 거기서 L군을 만난 덕분으로 나는 피병원 신세를 지지 않고 고모님댁 다락에 숨어서 두 달을 보냈다.
천장이 낮은 그 다락에서는 일어서지는 못하고 앉거나 눕는 것이 고작이다. 허리를 굽히고 드나드는 나를 고모님이 민망해 하실 때마다, 『제가 고분고분 고개 숙일 줄을 모른다고 하늘이 이런 기회를 만들어 나를 길들이는 겁니다』하고는 웃었다.
딱지를 건드려서 얼굴이 얽지 않게 하려고 밤이면 두 손을 묶고 잠자리에 누웠다. 탕약을 지어다먹고 꿩고기·토끼고기로 열을 다스리고 해서 두 달 후에는 내 육체에 깃들었던 병균은 깨끗이 씻어졌다.
부립병원으로 찾아가던 그 날, 하필이면 왜 노상에서 부상한 노무자를 만났을까? 그들에게 말로만 영제병원을 일러주었던들 그 길로 나는 격리병실까지 내 발로 찾아갔을 것이다.
곰처럼 미련했던 내 자신을 돌이켜 보면서 하늘이 내 우직을 긍휼히 여겨 부상한 노무자룰 보내준 것이 아닌가-그렇게도 생각해 본다.
천연두는 내 개인의 건강문제에 불과하지만 언제나 이런 엉뚱한 방법으로 위기에서 나를 구해준 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운명의 여신 앞에 무릎을 끓고 합장하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도 한 말이지만 「아까시」철교(산양본선)의 열차추락사고도 그래서 면했고, 1월27일 백주의 동경공습이며, 뒤에 나올 6·25동란 때의 「토마토」이야기 같은 것도 그러한 하늘의 가호로 알고 있다.
70여년의 생애를 통틀어서 내가 지나치게 가혹했던 것도, 지나치게 너그러웠던 것도 모두 이 보이지 않는 운명의 여신이었다.
네번 부두로 나갔으나 수송력(선박)은 거의 군에 뺏겨버리고 연락선을 탈 차례가 내게까지는 좀처럼 돌아오지 앉았다.
그새 나는 만주에서 가져온 인세 나머지로 창도섬에 있는 조부님과 선친의 묘를 개장하고 비석을 새로 세웠다. 부산이 함포사격의 목표가 된다는 소문들이 있었고, 내 자신이 살아서 두 번 돌아오지 못할 경우를 예상해서한 노릇이었다.
또 한번 부두로 나갔으나 그 날도 승선허가를 얻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고오야잔」(고야산) 승방에서 조선어사전을 일역한다는 언약-그 하나 외에 일본으로 기를 쓰고 가야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나는 연락선을 단념하고 개 한 마리를 데리고 김해군 대저면 산 속으로 들어갔다. 인가에서 5리길이나 되는 그 산허리 중턱에 김해 김씨의 재실이 있어 거기를 쓰도록 편의를 보아준 이가 있었다.
「다로오」라는 「아끼다」종의 일본 개-, 식량난으르 못 기르게된 것을 그저 얻어오다 시피 한 그 개는 몸집은 송아지만큼 큰데도 이제 겨우 8개월 남짓한 애송이였다. 산중살이의 의로움 탓도 있었겠지만 몹시도 나를 따랐다.
한 달에 한두 번 부산으로 나올 일이 있어 줄에 매어두고 오면 울부짖는 소리가 5이나 떨어진 국도에까지 들려왔다. 솔가지로 군불을 때거나 밥을 지을 때도 연기에 눈물 콧물을 홀리면서도 죽자하고 아궁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토록 정들었던 「다로오」를 마을 어느 집에 맡기고 나는 서울로 왔다. 범부선생이며 오종식형, 그의 몇몇 친지들의 의견을 따라 강원도 월정사로 갈 것을 정하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 절에 가서 입을 회색 한복 두벌씩(하동)을 바느질 집에 맡겼다. 8월13일이 한복을 찾을 날짜였다.
부산을 떠난다는 사유를 동경이며 서울에 서신으로 알리고 편지 뭉치며 원고들을 불에 태웠다. 13일에 된다던 옷이 2, 3일 늦어진다고 해서 부산서 그 날짜를 기다렸다.
8월14일 밤, 나는 영도섬 산 위에 있는 김정래군(내가 다니던 옥성학교 설립자의 장손) 집에서 하룻밤을 쉬었다. 아침을 마치고 나자 「라디오」가 정오의 중대 「뉴스」를 예고했다. 또 시뻘건 거짓부렁의 「대본영발표」려니 했더니, 그것이 바로 일본천황이 패전을 국민 앞에 고하는 이른바 「옥음방송」이었다.
나는 산길을 내려오면서 구멍가게 앞에서 그 방송을 들었다. 가게 앞에 마을 부인네들이 4, 5명 모여 앉았다가 내 얼굴을 보자 『이기 무슨 방송인기요?』하고 물었다.
「라디오」탓인지 소리가 흐려서 잘 들리지 않았지만 『짐은…』『짐은…』하는 것이 천황의 방송임에 틀림없었다.
『전쟁이 끝났답니다. 오늘밤부터 전등을 켜도 됩니다.』-그러는 내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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