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치는 꼴찌, 임금은 최고 … KGB택배의 신바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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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부터 택배기사로 근무 중인 한재오 KGB택배 영업소장은 올여름 입사 이후 처음으로 ‘공식 휴가’를 다녀왔다. [김형수 기자]

서울 노원구에서 KGB택배 영업소장으로 일하는 정문순(44) 소장은 지난 14일 배송수수료(월급)로 293만여 원을 받았다. 그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6만원(5.8%) 늘어난 금액”이라고 말했다. 같은 지역에 근무하는 한재오(50)씨는 이달 15~17일 처가인 전북 무주로 휴가를 다녀왔다. 2007년 택배를 시작한 이후 ‘첫 정기휴가’였다. 한 소장은 “농사도 거들고 피서도 즐기면서 가족과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며 흐뭇해했다.

 ‘11.6%의 평균 수수료(급여) 인상, 2박 3일의 휴가’. 여느 기업에서 볼 수 있는 단체협상 결과다. 하지만 택배업계에선 이를 ‘파격 행보’로 받아들였다.

 이유는 이렇다. 먼저 수수료 인상.

 KGB택배는 올 6월 9일부터 본사와 대리점, 택배기사 간 배송수수료 체계를 조정했다. 단가 2500원짜리 상품을 기준으로 본사·대리점·기사 간 수수료를 각각 700원·700원·1100원씩 가져가기로 합의한 것. 기존에는 각각 750원·750원·1000원을 받아갔다(지역에 따라 차이 있음). 본사와 대리점이 50원씩 양보해 기사 수입이 100원 늘어난 것이다. 경쟁사보다 50~400원 높은 업계 최고 수준이다.

 그깟 100원이 얼마나 대수인가 싶지만, 수수료 조정은 업계에서 가장 첨예한 사안이다. 수수료 조정으로 KGB 택배기사 2500명은 이달 평균 183만원의 배송수수료를 받았다. 지난해 8월(164만원)보다 19만원 가량(11.6%) 늘었다. 연 수입이 230만원 오른 셈이다. 반대로 본사와 대리점 156곳은 각각 4억7000만원씩 수입이 감소했다. 얼마나 민감한 이슈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택배 단가가 오르지 않는 이상 3자가 제로섬 게임(누군가가 이익을 보면 그만큼 누군가가 손해)을 해야 해서다. CJ대한통운·한진택배 등이 수수료 조정 때문에 갈등을 겪은 것도 이 때문이다.

 본사로선 한해 60억원 가까운 수익 감소를 감수한 것이다. 이 회사 장지휘(50) 사장은 “고객 서비스 강화와 중장기 성장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했다.

 “최근 택배 업계는 배송 조직의 이탈로 서비스가 붕괴되고 있다. 업의 핵심은 ‘배송’인데 실핏줄 조직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택배기사의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해 주는 게 첫 번째 해결책이었다. (수수료 조정을 위해) 6개월간 주말 없이 전국을 다니면서 대리점주와 택배기사를 설득했다.”

 택배기사의 수입이 늘어 안정적인 근무여건이 만들어져야 서비스 품질 개선→영업 조직 확대→본사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는 얘기다.

 다음은 휴가. 택배기사는 기본적으로 자영업자다. 쉬고 싶으면 얼마든지 쉴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그래서 KGB택배는 날을 정해 2500명 택배기사 전원이 쉬도록 한 것이다. 어느 택배업체도 시도하지 않은 일이다.

 장 사장은 “후발주자의 고육책이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시작해야 할 일”이라며 “수수료 조정이나 여름휴가를 제공한 것도 같은 배경이다”라고 덧붙였다.

 KGB택배는 1999년 창업한 업계 후발주자다. 지난해 배송 물량 4700만 상자, 매출 1380억원이었다. 업계 1위인 CJ대한통운과 비교해 10분의 1도 안 되는 꼴찌 업체다. 그런 업체가 일종의 ‘반란’을 일으킨 격이다.

 KGB발 ‘신택배 실험’이 찻잔 속 태풍에 그칠지, 전국 4만여 택배기사의 삶을 바꾸는 첫단추가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다만 업계가 ‘현장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CJ대한통운은 올해부터 중·고·대학생 자녀를 둔 택배기사에게 학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무료 건강검진과 경조사 물품 지원도 시작했다. 우체국택배는 지난달부터 주5일 근무를 시행 중이다. 업계 관계자는 “토요일 배송 때 수신인 부재 비율이 60%가 넘는다. 이런 비효율을 걷어내는 취지”라고 말했다.

글=이상재 기자
사진=김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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