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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냉대·차별 속에서도 잊지 않는 "뿌리"|재일 한국인 2세들의 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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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모여라, 단군의 자손 노래하라 너의 마음을 창조하자 밝은 내일을.』 80년 여름 「후지 산 산록과「와까야마껜」 「난끼가쓰우라」 해안 등 일본 전국 8개 휴양지에서 열린 재일 교포 2세들의 하계「잼버리」에서 2천5백여 젊은이들은 일본사회의 냉대와 차별을 물리치고 꿋꿋이 살아가겠다고 이같이 다짐했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있는 교포청년들을 한자리에 모아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상호유대를 튼튼히 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이 모임은 올해로써 5년째-.
올 여름에는 개최장소를 늘려 보다 많은 교포청년들이 자리를 함께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임삼호 청년회장(35)의 포부다.

<매년 여름 야영대회>
이「잼버리」에서. 고국 말이 서툰 2세 청년들은「안녕」이란 인사말부터 시작해 송창식 의「왜 불러」등 고국의 노래를 목청껏 불러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며 또 밤을 새워가며 취직·결혼·민족문제 등 교포 2세들이 한결같이 맞고 있는 문제들을 허심탄회하게 논의한다. 그러나 언제나『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피부로 되새기면서 토론은 끝난다.
『결혼문제나, 민족 문제를 동포청년들과 얘기한 것은 처음이다. 이런 문제는 일본인들과 얘기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곳에 와서 흉금을 터놓고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쁘고 가슴 벅찼다』(신철호·22·대학생).
참석했던 젊은이들은 한결 같이 일본사회에서 느꼈던 고립감·갈등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는 것을 커다란 수확으로 꼽고 있다.
현재 재일 교포 사회는 세대교체를 겪고있다. 일제말기 징용으로 끌려와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생활의 기반을 마련한 1세들이 서서히 무대 뒤로 사라지고 2세들이 등장하고 있다. 80년 말 현재 1세의 수는 전체교포 66만명의 약25%. 그나마 나이 등의 탓으로 가정은 대부분 2세들이 꾸려가고 있다.
1세들이 생계의 위협을 받으며 맨주먹으로 몸을 일으킨 데 비해 이들 2세들은 부모의 덕으로 물질적인 고통을 1세들만큼은 받지 않고 자랐다.
그러나 이들 2세들이 걷는 길은 결코 평탄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1세들이 겪은 것보다 더 가혹한 정신적 고통 속에서 방황하기도 한다. l세들에게는 떠나온 고국과 고향이 정신적지주가 될 수 있었으나 일본 땅에서 태어나 고국에 대한 기억을 갖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 공백을 메워줄 정신적 지주가 없다.

<한국적 알면 멀어져>
『재일 교포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주변의 눈초리가 갑자기 차가와 지고 부드럽던 인간관계가 그 순간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하나씩 끊겨져 나갔다. 나는 고독한 성에 갇힌 죄수와 같은 느낌이었다.』고등학교에 입학 할 때 비로소 자신이 한국적임을 알게 되었다는 교포2세 박리자양(22·횡빈)은 이렇게 당시의 충격을 회상하고 있다.
동경의 모 한국계상사에 근무하고 있는 박양은 지금도 그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 대인관계에 많은 갈등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2세 교포들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취직과 결혼 그리고 민족문제. 수년 전 교포청년 박종석(30) 씨가 「히따찌」 제작소 인사시험에 합격했다가 한국인이란 이유하나 때문에 입사가 취소된 사건은 누구의 기억에도 생생하다.
인력부족으로 고민하는 일본사회에서 연간 1만명 이상의 교포청년들이 취직전선에 나서고 있지만 일본회사에 들어가는 수는 10%도 안 된다.
나머지 청년들 중 4천∼5천명 정도가 일본에 있는 한국계 회사나 민단조직 등에 자리를 얻고 그 밖의 4천명 정도는 1세의 가업을 이어받거나 그렇지 않으면 일정한 직업 없이 떠돌기 일쑤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좌절하지는 않는다. 홍성태씨(33·대판)와 전하자씨(25·병고)부부는 78년 하계「잼버리」에서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결혼에「골·인」했다.
신랑은 다섯 번, 신부는 세 번이나 그 동안 선을 보았었다. 선을 본 상대 중에는 일본인도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단계에서 일본 측 부모가 끝까지 반대해 결국 일본인과의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물론 재일 교포2세들이 모두 홍씨와 전씨처럼 맺어져 한국인 3세, 4세를 낳는 것은 아니다.
73년에 집계된 후생성 통계를 보면 이해에 결혼한 재일 한국인 7천4백50쌍 중 배우자의 어느 한쪽이 일본인인 경우는 3천5백76쌍으로 거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
재일 한국인 사회는 이렇듯 3세, 4세로 내려갈수록 피의 분포도도 달라지는 셈이다.

<직장선 일본성 사용>
그러나 홍·전 부부는「잼버리」덕택으로 한국인 핏줄이 이어지게 된 것을 무척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 일본인과 결혼한다 해도 일가가 모두 일본에 귀화하지 않는 한 외국인 특히 한국인에게 극도로 폐쇄적인 일본사회의 편협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에는 홍의 문패, 회사에 나가서는「마쓰모또」가 되는 이중성도 작년부터 버렸다고 했다.
2세 교포 김경득씨(32)는 일본 유일의 일본태생 한국인 변호사다.
수년에 걸친 법정투쟁 끝에 변호사가 된 그는 비록 일본인 변호사와 함께 일하고는 있지만 끝까지 한국인「변호사 김경득」의 인격으로서 살아가겠다고 다짐한다.
『이름만 한국인이지 속은 이미 일본인이 다 됐다』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뿌리는 지켜야 한다』고 그는 힘주어 말하고 있다. 【동경=신성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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