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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볼펜 홍수시대에 청석벼루를 지켜(충남 보령군 청라면 의평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매화가지에 두견새 한 쌍이 사망을 속삭인다. 입안 가득히 여의주를 문 와룡 두 마리는 비상의 자세로 용틀임을 하고있다.
예나 다름없이 문방사우의 하나로 선비 곁에 사는 벼루. 푸른빛이 도는 벼루 뚜껑에 양각된 만상문양이 숨쉬는 듯 살아 움직인다.
충남 보령군 청나면 의평리는 청석벼루, 일명 남포연의 본 고장. 청석 벼루전국수요의 60%를 대고있다.
예부터 석질이 중국의 단계석에 버금간다는 청석은 이 마을 남쪽으로 열두 폭 병풍처럼 드리운 성주산의 특산품으로 오늘의 벼루마을을 만들었다.
그 중에서도, 성주산 장운봉에서 캐는 청석, 즉 백운상석은 특히나 일품. 먹 가는 명이 유리알처럼 꼽고 입김을 쐬면 새하얀 김이 오래 서려야 상품. 백운상석은 이러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13세 때부터 선친의 뒤를 이어 백운상석을 다듬어 온 김진만씨(42)는 『물이 잘 마르지 않고 벼루밑판에 은사가 박혀 있어 먹이 골고루 잘 갈리게 하는게 백운상석』이라며 『흔히들 말하는 남포오석연은 잘못 알려진 것』이라고 소개한다.
이 마을 60가구가 뺑 돌아가며 벼루를 만들지만 김씨네는 바로 청석 벼루의 종가다. 『영감이 떠오르지 않으면 끝내 끌을 잡을 수가 없어요.』 김씨는 벼루가 하나의 작품임 강조한다.
그의 선친 갑룡씨(71년 별세)는 66년 벼루제작으로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았던 당대의 솜씨.
일제 때인 1933년, 성주산이 탄광지대로 개발되면서 질 좋은 청석이 함께 쏟아져 나왔다.손 재주가 비상했던 갑룡씨의 벼루는 만들기가 무섭게 총독부 관리들 손으로 팔려나갔다. 서울의 대가 집에선 그의 작품을 가보로 후손에 전하려고 주문이 밀어닥쳤다.
갑룡씨는 아예 농사일을 제쳐놓고 오직 벼루 일에만 전념했다. 그러나 가세는 점점 기울고 살림은 어려워져만 갔다.
벼루 하나 새기는데 꼬박 반년이나 1년씩 걸리는 대작만을 고집한 때문이었다. 70평생을 벼루와 함께 해온 그의 뜻은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해인 72년 5월 아들 5형제의 결의로 가업이 이어졌다.
장남 진호씨(47)는 원석을 캐고 2남 진한씨, 3남 진영씨(40)는 벼루를 제작했다. 4남 진원씨(37), 5남 진두씨(34·현재 중동에서 근무)는 판로개척에 나섰다. 5형제의 노력으로 벼루공방은 선친의 옛 얼을 되살렸고 온 마을의 생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지난해에 5천3백 개의 벼루를 생산, 3천1백80만원의 매상을 올렸습니다』 청나면 부면장 조성찬씨(43)는 이 마을의 가구 당 소득이 연간 3백만원으로 절반 이상이 벼루생산에서 얻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62년부터 소규모로 일본에만 1만여 점을 수출했으나 지난 78년엔 단 한해에 미국으로 6천5백 점을 수출했다.
마을에서 3km쯤 떨어진 채석장에서 원석을 캐면 적당한 크기로 쪼개 10평 남짓한 김씨집 벼루공장에 운반된다.
석광 심층부에서 캐낸 원석을 절단기로 갈라 전동물레에 물려 판잡기로 앞·뒷면의 수평을 잡고 크기·모양에 맞춰 깎는다.
대충 형태가 갖춰지면 다음작업은 「밀링」기계로 내부 「흠」을 파 평 모래로 꼽게 다듬는 일.
벼루 뚜껑은「다이어먼드」를 박은 끌로 다듬으면서 벌꿀에서 나오는 밀칠을 해 망을 낸다.
현재 김씨네가 양성하는 숙련공은 모두 6명. 숙련공이 되려면 2년은 족히 잡아야 한다고 15년째 김씨 집에서 일해온 원양재씨(37)는 『수입보다는 좋은 작품을 만들어 청석 벼루의 명예를 지키는 일』에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어려운 무늬가 안 들어가는 평 벼루는 마을 주민들에게 도급을 준다. 수입은 비숙련공의 경우 하루 평균 6천원. 하루에 벼루 뚜껑 2개를 새겨 4천원을 번다는 주부 최영숙씨(37)는 『광산에 다니는 남편 수입을 도와 궁색하지 않은 살림을 한다』고 했다.
벼루는 장인의 솜씨 따라 모양과 형태가 가지각색. 일원형·타원형으로 구분되는가하면 뚜껑 문양에 따라 매조연·용연·봉황연 등 30∼40종류로 나뉜다.
값은 뚜껑 문양과 크기에 마라 학생용 1천원에서부터 60만원을 호가하는 특제품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
특제품은 청석 중에서도 땅속 깊은 곳에서 나는 수심석(수심석)을 사용한다.
76년 진한씨가 관광 민예품 경진대회에 출품했던 특상「복수연」은 값을 매길 수 없는 수작.
10년째 벼루 방을 자영하는 최두석씨(48)는 『청석 벼루가 물량이 달릴 만큼 주문이 많지만 유통기구가 따로 없어 제값을 못 받는 게 안타깝다』며 『「볼펜」시대에 벼루 인구가 줄지 않는게 큰 위안』이라고 했다. <보령=전종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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