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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오관에 스미는 다향에 번뇌는 씻은 듯|전통 다도 명맥 간직한 해남 대흥사 일지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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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호남 제일리 대흥사를 찾는다. 한반도 남단 전남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두륜산록. 선교양종의 본산이다.
두륜봉 정상을 향해 오솔길로 2㎞. 산중턱 양지바른 곳에서 초의 선사의 다실 일지암을 만난다.

<초의 선사가 부활>
근대 선승가운데 가장 빛나던 초의 선사(1866년 입적)는 이 나라 다도의 정통성을 살려 대흥사에서 초의 다법을 일으켰으니 추사의 글, 소치(허유)의 그림과 더불어「해남삼색」로 일컫는다.
삼색이 어우러져 당대의 높은 풍류를 누렸던 일지암 다실엔 화로위 탕관에서 찻물이 끓고 있다.
『쏴아-』바람이 대숲을 흔든다. 바람소리, 수증기에 떠 받혀『달그락』대는 탕관의 뚜껑소리, 자연의「하머니」외엔 고요가 흐른다.
고려다도의 생명을 오늘에 잇고있는 「해남 다인회」의 월례다회는 세속의 번뇌를 다도로 씻은 듯 삼매에 들어있다.
오늘의 방주는 일지암 상좌 전용운 스님. 초의 선사가 쓰던 오묘한 다기 한벌이 선을 보인다.
탕관의 물을 살핀다. 설익은 물은 차맛을 버린다. 탕관을 화로 위에서 들어 대나무 받침대에 옮긴다. 아직 팔팔 끊는 물은 생기가 있어 안되고 덜가신 것은 맹탕이라 못쓴다. 맹탕을 지나 물의 움직임이 멎으면 이때가 경숙.
주인은 탕관에서 물을 떠내 차를 우려내는 다관에 붓고 다시 찻잔에 고루 나누어 그릇의 냉기를 없앤다. 다관 씻기가 끝나면 탕수를 떠서 식힘사발에 담고 차단지에서 차를 꺼내 다관에 넣는다. 식힘사발에서 적당한 온도로 물이 식으면 다관에 부어 차를 우린다.
차가 우러나는 동안 방안은 정적. 찻잔에 차를 따를 때는 농도를 고르게 하기 위해 세번에 나누어 따른다. 잔을 쟁반에 담아 나이순으로 권하며 주객은 가벼운 목례를 나눈다.
주인이 다구 앞에 돌아가 앉으면 좌중은 천천히 차를 든다. 두 손으로 찻잔을 들어 왼손으로 잔굽을 받치고 오른 손으론 잔을 감싼다.
오관을 열고 맛을 음미한다. 눈으로 빛깔을 보고, 코로 향을 맡으며, 입으로 맛을 재고, 손으론 잔의 감촉을 느끼며 귀로는 찻물 끊는 소리에 취한다. 보통 세 번 정도 나누어 한잔을 마신다. 『아, 오늘 스님의 전다(차 달임)가 격을 맞추셨소. 근래의 가품이오.』
『설연(보성산 다)을 썼는데 중화가 제법 된 듯하나 향이 다소 모자라는 듯 합니다.』 품평에 오가는 문답이 다향만큼이나 우아하다.

<다인 회원은 16명>
거의 잊혀가고 있는 우리의 옛 다도를 되살리는「해남다인회」(회장 김제현·54·해남 종합병원장)의 노력은 이제 뿌리를 내려가고 있다. 정식으로 모임이 발족하기는 78년. 극작가 김봉호씨 등 문인들을 중심으로 다도 부흥운동이 벌어져 왔다.
현재 회원은 16명. 한달 회비 l천원으로 문인·의사·교사·공무원·농업 등 자격에 제한 없이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매월 한번씩 정기 다회를 갖는다. 회비는 모임연락 통신비·회보 발간에 쓰이고 다회 경비는 회원이 돌아가면서 부담한다.
다도를 닦는 외에도 대흥사와 초의 선사를 중심한 다도사 발굴, 전통다도의 일반보급 등 활발한 활동을 펴고 있다.
다도라면 흔히 일본을 연상한다. 그러나 그들보다 훨씬 앞서 우리의 다도는 정립되어 있었다. 해남이 바로 그 중흥의 고향인 것이다.
신라 궁중과 사원을 중심으로 시작된 차 마시는 풍습은 고려조에 들어 불교의 융성과 함께 고유의 전통을 형성했다. 왕실다·귀족다·사원다·서민다로 나뉘어 하나의 도를 완성하게 된다. 고려청자의 발달도 상당부분 다도발전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 다도 연구가들의 의견이다.
다도는 조선조 들어 불교의 탄압과 함께 갑자기 쇠퇴했다. 절마다 딸렸던 다촌이 없어지면서 대중화까지는 되지 못했고 차 마시는 풍습도 사라져갔다.
『우리 다도는 3백여년 일부 사원에서 간신히 명맥을 이어왔읍니다. 그러다 초의 선사가 나와 해남대흥사에서 다도재연의 깃발을 올린 겁니다.』
다인회 총무 정재홍씨(52)는 초의 선사의『동다송』『다압전』등 저술을 묶어 영인한『초의 선집』을 내보인다.

<다구만도 20여종>
초의는 조선조 정조10년(1786년) 전남 무안군 삼향면에서 출생했다. 추사 김정희와는 동갑이고 다산 정약용보다는 15세 아래. 5세 때 입산, 불경은 물론 유교의 경전과 시문·서화에까지 능통한 당대 제일의 고승이었다. 24세 때 대흥사에서 이곳 강진에 귀양와 있던 다산을 만나고 39세에 서울에가 추사를 만난 뒤 세 사람은 평생을 두고 다도를 걸으며 청교를 이었다.
초의 다법의 특징은 「수덕의 길」로 요약된다.
『중국이 다향을 중시하고 일본이 빛깔을 중시하는데 비해 우리의 다도는 향과 빛깔을 함께 추구하는 중도와 종합의 특징을 갖고 있지요.』
김봉호씨는 일본이 인위적이라면 우리는 자연적이요, 그쪽이 향미적이라면 우리는 종합적인 도라고 설명한다.
또 회원 윤상렬씨(47)는 3국의 다도특징을 이렇게 말한다.
중국은 명칭부터가「다법」. 당나라문인 육우의「다경」에 연원을 두고있다. 일본다도가 의식적·기교적이며 섬세한데 비해 그들은 마시는 격식·절차보다 차의 맛과 향 그 자체를 중시한다. 즉 중국인들의 실리적이고 대륙적인 기질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다도는 맛과 의식보다 차 마시는 행위의 정신적인 측면을 더욱 중시한다.

<산수를 써야 제맛>
다도는 우선 차를 정성스레 마음으로 마시는 일부터 시작이다. 본격적으로 수련하자면 다구만도 20여종을 갖춰야 하지만 일단 차만 있으면 어디서나 다도는 있는 법. 보성에서 나는 국산차「설연」은 상품(만수)이 1백20g에 1만2천원, 중품(천수)이 7천원, 하품(백수)이 5천원이다.
그 다음은 차를 우려내는 다관·찻종 등 몇 가지부터 마련하면 일단 다도의 문에 들어선 셈이다.
다관은 통상 질주전자나 쇠구리 주전자를 쏜다. 찻잔은 도자기로 다 빛깔이 잘 우러나 보이는 흰색 계통이 좋다. 물은 산수를 으뜸으로, 강심수를 다음으로, 우물물을 그 다음으로 친다.
도회지 가정에선 산 속의 모래를 채취, 깨끗하게 씻은 뒤 질그릇 항아리 밑에 깔고 수도 물을 받아서 삼베로 덮고 바람이 잘 통하는 응달에 7∼8시간 두었다 사용하면 된다.
생활 다의 형성을 위해 다인회는 월례다회에 우선 부인들을 대동키로 했다. 또 해남읍 내 해림 다방에 「커피」와 같은 값으로 우리고유 차를 팔도록 주선했다.『차에는 구덕이 있다고 해요. 머리를 맑게 하고 귀를 밝게 하며 눈을 밝게 합니다. 또 입맛을 돋우고 술을 깨게 하며 잠을 줄이고 갈증을 멈추며 피로를 풀고 추위와 더위를 막는 것이지요.』의사이기도 한 김 회장은 국민건강을 위해서도 다도가 생활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글 문병호 기자 사진 김택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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