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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은「오똑이」인가…|「홍콩」서본그실상과허상(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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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운남성의 농부 임월공은 78년 개울가에 버려진 땅을 일궈 땅콩을심고 돼지를 길러 1천2백원(약52만원)의 부수입을 올렸다.79년의 농민1인당연간 평균소득이 83.4원(약3만6천1백원)인 사회주의 사회에서 그가 올린 부수입은 엄청난것이었다.
운남생요안현의 양봉농가 하정희는꽃밭을 찾아다니며 양봉하는 남다른열성으로 그해 1만여원의 초과이윤을 냈다.초과이윤에 대한 20%가 하에게 상여금으로 돌아간다면 2천원이나 된다.
두마을의 주민들은 이같은 사실들을 알고는 눈이 빨개져서 부수입과상여금이 개인에게 돌아가서는 안된다고 반대했다.
생산대간부들과 당지부서기도 임과하의 생산방식이 자본주의의 부활이나 다름없으며 그같은 행위는 농촌의 동질성을 파괴하는 독소라고 몰아붙이고 그를 군중대회에 회부했다.
이사건은 78년 한때나마 중공남부지역에서「공부병」(부유해지길두려워하는 병)파동이라는 기묘한 열병을 전염시켰다.
농민들은 부업에서 일손을 eP고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운남일보가 이사실을 알고 임과 하의 행위를 비호함으로써 이 파동은 얼마뒤에 가라앉긴 했지만 그 후유증은 컸다.
인민일보등 전국의 언론들이 한동안「파차이」(발재=돈을 버는것)는죄악이 아니며『부는 죄악이며 가난속에 혁명의 도리가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라고 대서특필하여 좌파사상에 찌든 국민들을 계몽해야했다.80년 구정에 중공에서 처음으로「공희발재」라는 전통적 축언이 인민들사이에 교환되어 한동안 화제를 뿌렸다.
훼과사건-..하북성정현류촌인민공사남장대대의 농민들은 소득증대를 위해 6천8백평의 땅에 수익성이 높은 오이나 수박을 심었다.농민들은국가가 정한 곡물과 면화의 책임생산량을 달성한 후에 여분의 땅에 오이를 심은것이다.오이와 수박이 여물어갈 무렵 느닷없이 인민공사의 당간부들이 들이닥쳐 모든 오이와 수박을 짓이겨버렸다.농민들은 눈앞에서 1만원의 소득(농가당75원의 손실)이 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을 눈물을삼키고 보아야했다.79년여름 중공을뒤흔든 유명한「훼과사건」이다.
공사측은 하급기관이 상급기관과 상의하지 않았고 이 공사의 소득증대를위한 생산방식이 자본주의 생산체제나 다름없다는 이유로 합리화했다.그들이 저지른 것을 인민일보는『훼과사건의 풍파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논설에서 이 사건은 당간부들이 하급기관에 전권을 휘두르는 풍토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했다.
「홍콩」의 중립지 명보는 훼과사건과 공부병파동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하나는 중공이 중앙집권적인사회이지만 중앙정부의 방침이 하부기관에까지 파고드는데는 우여곡절과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다른한 측면은 노동생산성이 개인의 자발성을 보강할 때와 강제노돔일 때와의 차이점을 뚜렷하게 부각시켰다는 사실이다.
농민들에게 부업을 장려하면 농민들이 정작 생산대에서 본업을 등한히할 우려가 있다는 일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중공이 농민들의 부업을 뒤늦게나마 장려할수밖에 없는것은 농민들의 소득수준이 보잘것 없기 때문이다.『통계를 보면 적지않은농촌지역에서 한가족이 총동원되어도한달에 버는 수임이 5원을 넘지않고있다.
자수 무명옷 한벌값이 5원이나 되지 않는가! 20세기 70년대에 나무껍질로 연명하고있다.하남성 신양지구는가장 살기 어려운 지방이 아닌데도 토박이 농민들이 바구니 하나만을 둘러메고 마을을 도망쳤다.』유명한 소설가이며 인민일보기자인 유빈안이 지난 79년에 흑룡강성의 청년문학가들에게 한 담화내용의 일부다.
농촌실점의 또다른 사례가 있다.
『백미는 명절이나 환자의 밥상에나 오른다.생산대에서 노동하는 댓가가 일당 3∼5각(l원이 10각)인데 돼지고기 1근 값이 1원이다.정부로부터 거의 무료나 다름없는 의료혜택등을 받기는 한다.농민들이 가장 고통을 느끼는 것은 혼인이다.시골처녀들은 농촌총각을 좋아하지 않는다.
더구나 농촌청년이 한번 혼인하고나면 보통 2천여원정도의 빚을 지게 마련이다.신부의 부모에게 보통l천원정도의 사례금을 반드시 지불해야 한다.중매장이에게도 몇푼 줘야하며 푸짐한 잔치도 베풀어야한다.
그래서 혼례후 5∼10년간은 빚청산에 그야말로 허리가 휘어질 지경으로 고생을 한다.이것은 복건성의이허백이라는 농부가「홍콩」의 공산계「쟁오」지에 기고한 글이다.
부수상 담진림은 50년대초에 농민의 월평균 소득이 4원이었는데 30여년이 지난 현재(79년) 고작 75%가증가한 6.9원(약3천원)이라고 했다.
농민들 사이에도 소득격차가 아주뚜렷하다.궁핍한 생산대에 소속된 농민의 1인당 월소득은 5원쯤이고 중급생산대의 경우는 10원내외이며 부유한 생산대의 경우는 15원정도.전체농민의 평균소득이 6.9원인 점을감안하면 8억농촌인구의 절대다수가궁핍한 생산대에 속해 있다는 것을의미한다.
이러한 사정이니 부업을 장려하지않을수 없는 형편이다.80년에 중공사상 처음으로 발간된 「중국백과연감」에 따르면 중공전체 경작면적의 5%정도를 차지하는 자류지(사유경작이 허용된 땅)가 농업총생산액의 20%를 생산했다.
특히 돼지·닭·오리등 가축물의 90%가 이같은 자류지에서 생산되며 놈민의 수입중 25%가 부업에서 나온다.
이렇게되면 중공도 멀지않아 전체경작지의 1%에 불과한 사유경작지에서 농업총생산액의 12%를 생산하는 소련처럼 될것으로 보인다.
지난 연말 중공경제관료들 사이에서 인민공사제도의 해체가 조심스럽게 거론됐다는 보도가 나온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수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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