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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기관 부동산, 안 파나 못 파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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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수도권전철 오리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 서쪽으로 400m만 가면 CGV영화관과 홈플러스·하나로클럽 이용 가능. 동쪽으로 300m 거리엔 탄천이 흐르는 공원.’

 10월 경남 진주시로 이전하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 본사(오리 사옥)의 입지 여건이다. 경기도 분당·용인·죽전지구의 기반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이른바 ‘금싸라기’ 땅으로 불리는 곳이다. 부지와 건물 넓이는 모두 11만㎡다. LH는 본사 이전에 따라 이곳 사옥 건물과 부속토지를 팔아야 한다. 가격은 3524억9000만원으로 매겨져 있다. 이를 판 돈으로 빚을 갚아 재무상태를 개선하는 데도 활용한다는 게 LH의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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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사들이는 기업이나 개인은 8층과 4층짜리 건물 두 채를 바로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정부 주도로 매각 추진된 2010년 이후 지금까지 새 주인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사정은 한국도로공사도 마찬가지다. 도로공사는 경기도 성남에 있는 본사 부지 20만4000㎡(건물 포함 22만7828㎡)를 2972억원에 매물로 내놨지만 사겠다는 사람이 없다. 이를 비워둔 채 10월 경북 김천으로 내려가야 할 상황이다. 도로공사 관계자는 “이따금 매입 관련 문의는 들어오고 있지만 적극적이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며 “본사 부지가 자연녹지로 지정돼 있어서 건물을 짓더라도 4층으로 높이 제한을 받는다는 게 가장 큰 약점”이라고 말했다.

 LH나 도로공사처럼 기존 사옥을 팔지 못한 지방 이전 대상 공공기관 부동산은 모두 48곳이다. 금액으로 따지면 5조6206억원이다. 국토교통부는 최근 이들 48개 부동산을 대상으로 투자설명회까지 열었지만, 서울 삼성동 한국전력 부지를 빼곤 아직 적극적인 매수 희망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부동산 경기 침체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수천억원대 투자로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시장에 주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건물을 못 팔아 이전이 늦어진 공공기관에선 불만을 나타내는 직원도 나오고 있다. “회사가 옮겨갈 지역에 아파트 특별분양을 받아뒀는데, 거기에 살지도 못하고 재산세·관리비만 내게 생겼다”는 것이다. 내년 하반기 세종시 이전이 예정돼 있는 국토연구원 관계자는 “모든 직원이 이전 연기를 원할 줄 알았는데, ‘왜 빨리 옮기지 않느냐’는 불만도 나오는 상황이어서 이를 다독이는 것도 간부들의 업무가 됐다”고 말했다. 경기도 안양에 있는 국토연구원은 지난해 12월 세종시로 옮기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기존 건물이 팔리지 않아 이전 시기를 내년 하반기로 연기했다. 국토연구원을 포함한 9개 기관은 부동산을 팔지 못해 돈이 없어 옮겨 갈 지역에 건물 착공도 못하고 있다.

이에 국토부는 조만간 공사 자금 보조 계획을 내놓을 계획이다. 이 때문에 공공기관 부채가 늘어나고, 그에 따른 이자 부담은 국민 세금으로 보전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일부에선 이들 공공기관이 소유 부동산을 파는 데 소극적이라는 의구심도 제기한다. 모두 수도권 요충지에 있어서, 나중에 부동산 경기가 살아나면 임대소득을 올릴 수익원으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또 공공기관 지방이전에 따른 업무 비효율성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면, 다시 수도권으로 돌아올 수 있는 명분으로 활용하려 한다는 얘기도 있다. 실제 이번 달 전남 나주로 이전한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는 서울 양재동 사옥의 6층 이상 건물분만 매각 대상으로 내놨다. 국토부 관계자는 “양재동 aT 사옥의 1~5층은 전시 업무나 농업 유관단체 사무실 임대용으로 남겨두기로 했다”며 “이 때문에 매수 희망자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맞지만 향후 서울 복귀에 대비하기 위해 국토부나 aT가 매각 작업을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고 반박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매각 방식을 탄력적으로 적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전문위원은 “부동산 경기가 살아난다고는 하지만 대부분 30억~50억원대 빌딩에 대한 것이지, 공공기관 부동산과 같은 수천억원대 물건은 해당하지 않는다”며 “굳이 헐값에 팔거나 빈 채로 남겨둘 필요 없이 정부 주도의 부동산펀드나 리츠를 만들어 이를 매입하고, 이에 따른 임대수익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현아 건설산업연구원 건설경제연구실장도 “정부가 수십 개의 거대 매물을 동시에 내놓은 결과 한국전력 부지 외에는 시장에서 외면받고 있다”며 “2016년까지 한꺼번에 팔려는 계획에 얽매이지 말고, 각 기관의 재무사정에 따라 탄력적으로 가격과 매각 시기를 조절하는 보완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세종=최선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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