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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여체의 신비로 『말을 하는 석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사악 삭 삭』 「캔버스」위를 달리는 연필과 목탄 소리만이 들린다.
서울 종로구 낙원동 화가 최쌍중씨의 「아를리에」.
모포가 깥린 긴 의자 위에서 벗은 여인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하얀 살결이 눈부시다.
밖은 영하 12도. 실내도 걸옷을 입지 않으면 썰렁한 느낌이지만 바로 곁에 놓인 두개의 난로 때문에 벗은「모델」은 추위를 느끼지 못한다.
3명의 화가중에는 여류가 2명. 세 개의「캔버스」에 옮겨진 「누드」는 여체의 신비스런 곡선과 유연한 명암으로 해서 각각 독특한 아름다움을 발하고 있다.
『자! 바끕시다]
최화백의 주문에 「모델」이「프즈」를 바꿔 새로운 자세를 취하며 묻는다.
『이거‥· 괜찮겠어오?』『좋습니다.』
새로운 곡선과 새로운 명암. 화가들은 새로운 아름다움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강신숙씨 (가명·31) .
남에게 알몸을 보이는 것을 절대 금기로 알고있는 한국사회에서 그녀는 벌써 11년째 그림「모델」을 하고 있다.
더구나 그녀는 남편과 딸 하나를 둔 가정주부.
특별히 예쁘거나 특별히 날씬한 몸매도 아니다. 키도 1m59cm로 보통.
그런데도 화가들은 강씨를 유능한「모델」 이라고 칭찬해 마지않는다.
『선이 분명한데다 침착 대담하고「모델」로서의 「연기력」 이 뛰어날뿐 아니라 남과 달리 자세 「레피터리」가 무한하다』는 것.
적어도 화가들에게는「모델」=미인의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언젠가 「발레」를 오래했다는 날씬한 무용수를 「모델」로 세워 봤더니 『그릴게 없더라』고 최화백은 말한다.
『「누드」를 제대로 그려낼수 있다면 예술의 언덕에 반은 오른셈』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역사상 인체「모델」은 그림에서 가장 진지하고 중요한 소재인데도 그동안 특히 한국화가들은 이「모델」때문에 고생을 많이 해왔다.
1920년대의 화가들은「모델」을 못구해 권번의 기생들을 실득해「모델」로 세우기도 했고 50년대에 어떤 화가는 대중목욕탕의 불때는 할아버지에게 담배를 상납해가며 구멍을 통해 여탕안을 들여다 본 뒤 「아롤리에」로 달려가 그림을 그린 실화까지 있을 정도다.
이같은 상황은 거의 60년대까지 계슥되다가 70년대에 들어서면서「조금씩 나아졌다」는 화가들의 설명이다.
강신숙씨가「모델」로 첫발을 내디딘 것도 이무렵.
서울대 미대에서「모델」울 구한다는 선문광고롤 보고 찾아간게 인연이었다.
71년 봄.
여고를 졸업하고 몸이 아파 쉬고 있을때 화가지망생인 친구 동생의「모델」(옷을 입은)을 서준 경험이 자신에게 용기를 주었고 비교적 힘안들이고 소일을 할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고 한다.
「모델」이 되는 동기는 대개「경제적인 것」과「자기고시욕」의 두가지 유형으로 나눠볼수 있지만 강씨의 경우는 둘중 어느쪽도 아니다. 이미 60년대부터 자가용을 굴릴만큼 강씨의 집은 여유가 있었고 강씨 스스로도 얼굴이나 몸매에 특별히 자신이 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첫날-. 등을 떠밀려 들어간게 동양화과 3학년 수업. 옷을 입은 「모델」인데도 20여명의시선이 따가와 얼굴이 붉어지고 새가슴처럼 심장이 뛰었다.
20분 서 있다가 10분 쉬는 수업을 반복해서 4시간 동안 계속하고 나니 긴장으로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저 그만 두고 싶었다.
「모델」료가 한시간에 8백윈씩으로 하루 네시간 일을 할 경우 당시 금 한돈쭝값의 큰 돈이었으나 당초 그랬듯이 돈 같은건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나 학교측에서 펄쩍 뛰었다. 『그만두면 학생들이 수업을 할 수 없다』고 협박(?)했다.
별수 없이 그렇게 1주일을 학생들 앞에 서고 나니 정말로 『「모델」이 없으면 수업이 안되는』미술대학의 사정을 알게됐다.
다음주는 조소과 졸업반. 이때 처음으로「누드」를 제의 받았다. 물론 펄필 뛰었다. 실랑이가 계속됐으나 버티면서 「누드」시간에 옷을 입고 들어가기 1주일.
결국 3주째 되는날, 월요일 조소과 3학년 수업에서 강씨는 처음으로 「누드」를 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고 가슴속에서 계속 대포 쏘는 소리가 났다』고 강씨는 말한다. 혹시 자신을 그린 학생을 만날까 봐 강씨는 한동안 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나 다방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시작한「모델」이라 오래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으나 다른화가들의 초첨도 받고 하면서 강씨는 자신에게서 「모델」로서 남다른 자질을 발견하고는 놀란다.
유능하다는 말을 자주 듣기 시작했고 점차 예술의 세계에 눈을 뜨면서 화폭에 담긴 자기 모습에 보람과 긍지를 느끼기 시작한것.
자신을 그린 그림이 외국에도 나갔고 현대미술관에도 강씨를「모델」로한 그림이 상설 전시됐다.
남편과 결혼한것은 동덕여대에 나갈 때인 75년. 연애결혼이었다. 그이는 가끔 외국에도 초청돼 나가는「헤비」급 「엔지니어」.
끔찍이 좋아한 나머지 연애시절부터 아예 사실을 숨겼다 .불필요한 오해때문에 그이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강씨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사실 언제까지나 술길 생각은 없었다. 살아가면서 설득을 시키려 했고 충분히 그럴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강씨는 한국사회가「모델」을 제대로 봐주지 않는 「벽」 올 남편에게서도 발견하고 주춤했다.
결혼후 언젠가 남편은 무슨 이야기 끝에 「모델」이야기를 꺼냈다. 『그릴수가 있느냐』 『어떻게 아무일도 없을수 있느냐』는게 적어도 남편의 사고 밑바닥에 깔린 「모델」관이었다. 미뤘다. 미룰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녀가 주변의 유혹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여행을 같이 가자』 『「아파트」를 사줄테니…』 등.『그러나 그점에 대해서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어요』.
세월이 흐를수록 남편에게 숨기고 있다는 사실이 괴로움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털어놓을 것이고, 기회가 오지 않는다면 임종의 자리에서라도 그것만은 곡 이야기하리라고 강씨는 다짐한다.
아뭏든 「모델」을 향한 강씨의 마음은 이제 짐념이다. 약속이 됐다면 몸이 아파도 약을 사먹으며 「아틀리에」로 나가고 외국책까지 사다가 새로운「포즈」를 연구하면서 새로운「레퍼터리」를 창초해간다. 아기를 낳을 달에도「모델」을 섰을 정도다(옷을 입은 두상「모델」) .
「모델」의 경력과 유능한 정도에 따라「모델」료도 시간당 2천원에서 1만원까지 여러 등급인데 강씨는 물론 항상 가장 많은 액수를 받는다. 그러나 넉넉지 못한 미술대학생들이 『추렴한 「모델」료가 모자란다』고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면 강씨는 그런 자리에도 액수에 관계치 앉고 서준다.
미술대학 1학년 학생들이 생전 처음으로 「누드」를 그리는 시간에 학생들이 좌불안석으로 들락날락하며 당황하면 『나는 말하는 석고다. 흔들리지 않고 그림을 그려야한다』고 오히려 이쪽에서 수업분위기를 진정시킬 정도로 여유도 갖게 되었다.
현재 서울의 그림「모델」은 3백명 정도. 대학생들의 「아르바이트」도 상당수지만 그들 대부분이 강씨처럼 가족에게 사실을 숨기고 있다. 그들을 모아 떳떳한 모임을 만들고 싶은게 강씨의 바람이다. 『이쪽에서 떳떳하게 나서야 사회에서도 바른 눈으로 봐주지 않겠느냐』 는 것.
「모델」강신숙씨. 그녀는 가기 본명을 밝히면서 11년쯤 더 「모델」을 하고 싶다고.
『화폭이 나를 필요로 할 때까지는 이「직업」을 계속 갖고 싶습니다.』 꼬마가 감기기운이 있다면서 강씨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오홍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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