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공포의 「레프트·펀치」에 필승의 투지 갖춰|신문 배달하며 중 3때부터 학업·복싱 계속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가난의 역경 넘겨>
남미 「베네쉘라」로부터 수렁에 빠졌던 한국 「프로·복싱」에 낭보를 던져 온 김철호 는 찢어지는 듯한 가난의 역경을 딛고 대성을 이룩한 입지부적인 「복서」다.
자그마한 체구에 날카로운 「마스크」로 의지와 신념으로 똘똘 뭉친 김철호는 61년3월 경기도 오산에서 김주헌씨 (52·서울 관악구 신림동 514의 23)의 4형제 중 세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태권도를 배워 (현재 초단) 동네에서 「무서운 아이」로 자란 김은 76년 겨울 영등포중 3학년 때 「복싱」을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를 거듭, 신문 배달을 하며 학비를 스스로 조달했던 김은 15세의 어린 소년으로서 매일 아침 코피를 쏟는 고난 속에 근근히 학업과 운동을 병행할 수 있었다.
78년 봄 천호상전 2학년 때 학생 「아마·복싱」 대회에 처음으로 출전, 8연승의 승승가도를 달리다 결승전에서 첫 패배를 맛보았다. 그러나 이때 8승 중 3차례의 KO승을 기록, 그의 천부적인 강「펀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해 여름 김은 서울시 「아마」 신인 대회에 다시 나가 마침내 우승을 거두었고 이에 자신을 얻어 10월에 「프로」로 전향, 「프로」 신인왕 대회에서 파죽의 4연승을 거두어 「플라이」급 왕자로 뛰어올랐다.
이때 김은 최우수 신인왕 후보에까지 올랐으나 같은 체육관 소속의 양일 (「페더」급)에게 이 최고의 영예를 양보했다.
김은 예리한 좌우 「훅」과 「카운터·블로」가 압권, 「프로·복싱」계의 주목을 한 몸에 모았으며 특히 「포인트」 위주의 섬세함보다 경량급답지 않게 일발 필도의 호쾌한 「펀치」가 일품이었다.
김은 작년 8월 국내 「주니어·밴텀」급 「챔피언」에 올랐으며 「엔리케스」 (필리핀)「상·통」 (태국) 「만·올리베티」 (필리핀) 등 외국 선수들을 모조리 KO로 뉘어 마침내 세계 도전의 기회를 붙잡았다. 『공포의 「레프트·펀치」』에 자신을 얻은 김은 출국에 앞서 『이번에 만약 진다면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버리겠다』고 필승의 기백을 보였었다.
현재 서울 봉천동의 대원 체육관 소속으로 김진길 「트레이너」의 지도를 받고 있다.

<『장한 내 아들…』>
아들의 쾌거를 전해들은 아버지 김주헌씨와 어머니 오맹자씨 (50)는 감격의 눈물에 젖은 채『장한 내 아들…』이라고 말끝을 맺지 못했다.
강서구 목동에 있는 삼남 목재소의 상무인 김주헌씨는 『철호가 아직 「프로」 경력이 만 2년 밖에 안돼 꼭 이기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면서 『매일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 나가 기도를 드린 우리 집안의 믿음이 기적을 가져온 것 같다』고-.
김씨는 『어릴 때 귓병을 앓아 시끄러운 데서는 흔히 귀가 멍해지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적지에 가서 과연 실력을 충분히 발휘할 것인지 불안했다』고 말했다.
어머니 오씨는 3년 전 아들이 「복싱」을 시작할 때엔 극구 만류했으나 신문 배달을 하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어려운 환경인데도 한사코 운동을 하겠다는 고집에 지고 말았으며 여러 「복싱」 사범들이 뛰어난 재질이 있다고 권하는 바람에 결국은 온 집안이 적극적으로 성원하게 되었다고-.
오씨는 철호가 야채와 과일을 가장 좋아하며 말없이 묵묵히 자기 할 일에만 몰두하는 성격이라고 말했다. 김철호의 가족들은 25일 온 동네 이웃들의 축하 인사에 파묻혀 있었다.

<『김철호 만세!』>
김철호의 세계 도전을 주선한 극동 「프러모션」의 군자동 체육관에선 25일 하오 2시 김의 승전보가 날아오자 관계자들이 일제히 환호, 『철호 만세』를 외치며 기쁨에 들떴다.
경기의 상보를 몰라 안타까와 하면서도 초반에 고전하다 역전 KO승임이 밝혀지자 『김성준과 「보라싱」의 경기 상황과 비슷한 것 같다』고 행운을 기뻐했다.
김종수 기획 실장은 『철호가 아직 나이가 어리고 경력이 짧아 다만 경험이나 쌓아오라는 생각으로 보냈던 것인데 예상외의 기적을 낳았다』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