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7)제72화 비관격의 떠돌이-김소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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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망설이다가 모닥불 곁으로 나도 내려갔다. 무얼하는 사람들일까. 그렇게 늦은 시간에-. 인부같이 보이는 그 사람들은 어쩌면 그 근방에서 늦게 작업을 마쳤거나, 아니면 이제부터 야간작업을 시작할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어디서 왔느냐?』『나이는 몇 살이냐?』『동경에는 친척이 있느냐?』- 제각기 한마디씩 질문을 걸어온다. 『대판에서 오늘 아침에 닿았다』고 했지만 아무도 곧이 듣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러자 내가 가졌던 책 한 권을『어디 보자. 무슨 책이지?』 하면서 하나가 받아 책장을 폈다. 그 속에서 우연히도 어제 날자가 퍼렇게 찍힌 대판시전의 승환권이 나왔다. 그제야 그들은 내 말을 믿는 기색들이었다. 모닥불 곁에 비스듬히 누운채 어느새 잠이 들었다
누군가가 흔들어서 깨어보니 거기 있던 인부들은 어디로 갔는지 하나도 없고, 모닥불도 꺼진 채다. 정신없이 한 시간쯤은 잔 것 같다.
나를 깨운 사람은 학생복을 입은 청년인데 이상하게도 어깨에 네모 난 큰 광주리를 메고 있다. 전신에 맥이 풀려 일어날 기력도 없다.
일어나라고 재촉하는 청년이 그저 귀찮기만 했다. 잠자코 내버려둬 주었으면 싶었다.
『이런데서 잠이 들면 얼어죽어요….』
청년은 기를 쓰고 나룰 일으켜 세웠다. 몇 마디 문답이 오갔다. 대판에서 아침 차로 내렸다는 이야기- 진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는 이야기- 묻는 대로 대답은 했지만 그 대답을 입으로 하는 것이 몹시도 힘들고 괴로왔다.
그날 그 곤전교에서 나를 구해 준 청년-, 그 청년의 이름도 성도 잊어 버렸다. 그가 네모 난 광주리를 메고 있었던 것과, 그를 따라서 텅텅 빈 마지막 전차로 가던 길이 무척도 멀고 지루했던 것만을 기억할 뿐이다.
「이이다바시」(반전교)에서「오오마가리」(대곡)를 지나면 다음 정류장이「히가시고껜쬬」(동오헌정)다. 관동대 진재때 태평양 전쟁의 공습으로 해서 면목을 바꾸어 버린 동경이지만, 이런 정류장 이름들은 지금도 60년 전 그대로다.
그 동오헌정을 왼편으로 꼬부라들어 너덧 집째, 「드라이크리닝」이라고 간판을 붙인 2층집 세탁소-, 거기가 청년이 나를 데리고 간 집이다. 그 청년이 조도전 대학에 적을 두고 밤이면 세탁집 외교원 노릇을 하는 고학생이란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새로 지은 집인지 깨끗하게 보이는 2층 방- 허물어진 오두막도 그날 내 눈에는 궁전으로 보였으리마는- 거기다가 나를 뉘어두고 청년은 먹을 것을 시켜오마고 내려갔다. 이윽고 그집 주부인지 중년 여인네의 꾸짖는 소리가 들려 왔다.
『어쩌면 그렇게도 소견머리가 없지- 그런 애에게「오야꼬·돈부리」(친자정)를 먹이다니-. 』
나 때문에 그 청년이 주인 마누라에게 꾸중을 듣는구나 싶어 몹시도 미안했다. 그러나 주부의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친자정 (흰 밥에 닭고기룰 얹은 덮밥)를 시키다니, 어쩌자는 거지? 하루 이틀은 흰죽이라야 돼요. 맡겨두고 2층으로 가라구, 죽은 내가 쑬께-.』
2층까지 들려오는 말소리를 나는 자리에 누운 채 눈물겨운 마음으로 들었다. 동경서 맞은 이 첫밤의 기억-. 눈을 감으면 지금도 그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연전에 나는 일문 수상집 한권에다「은수 30년」이라고 이름을 붙였다.「은수」-이 두 글자는 일본에 대한 내 감정을 과장없이 표현해 주는 한 마디다. 원수이기도 하려니와 내 주림을 건져주고 잔 뼈롤 굵게 해준 것도 또한 일본이다.
2, 3일을 거기서 쉬고 나서, 그 청년의 소개로「야마또쇼오까이」(대화상회)라는데 물들어갔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골목안에 자리잡은 자그마한 여염집이다.
사원이라고는 스물 대여섯 난 청년들이 4, 5명- 수세미를 가공한 특허품을 잡화상이며 화장품 가게를 찾아다니면서 선전 겸 도매하는 것이 그들의 소임이다. 제품은 딴데서 만들어 오니 나 같은 나이 어린것이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나도 며칠 후부터 그 사원들 틈에 끼어 꼬마 선전원 노릇을 했다. 얼마 지나서는 야간중학엘 다니게도 되었다.
다른 청년들은 모두 통근인데 나만이 그 집에서 기거를 같이한다. 그 시절만 해도 인심이 후했던지, 특히 그 집만이 그랬는지, 나를 남의 식구로 대하지 않고, 갈 때도 언제나 자기네들이 자는 칸막이(후스마)없는 옆방에 나를 재웠다. 방이 없어서가 아니다.
빈방이 여럿 있는데도 열칠팔세 되는 딸과 나란히 이부자리를 펴고 그 옆에 50가까운 내외가 자리를 편다. 주인되는 사람은 아무리 보아도 수세미 가공품을 .장사할 사람같지는 않고, 무슨 정객이나 실업가 같은 인품이다. 내가 어렸던 탓인지 그들에게서 민족적인 우월의식 같은 것을 느낀 적은 거의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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