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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특종] 징용한인 하와이 포로들이 제작한 '자유한인보' 4,5권 발견

중앙일보

입력

일제에 의해 강제징용 당해 남양군도 등에서 미군에 포로가 됐던 한인 징용자들이 하와이 수용소에서 만든 주간지 '자유한인보' 4,5호 진본이 발견됐다. 자유한인보는 미군에 포로가 되어 하와이 수용소 캠프에 갇혀 있던 2700여 한인 포로들의 유일한 소식지로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한 이후 주간지 형태로 모두 7호까지 발간됐다.

이 잡지는 한인 징용자들의 생활상은 물론, 한국 및 세계 정세 등 각 분야의 당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원본은 7호만 국가기록원과 독립기념관에 확보된 상태였고 2013년 말 3호 사본이 발견된 바 있으나 나머지 존재는 드러나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이번에 발견된 4,5호 원본은 한국에서도 아직 확보되지 않은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3호(1945년 11월 15일), 4호(11월 23일), 5호(12월 2일)의 발간일을 감안할 때 귀국이 확실시되던 45년 10월 말 첫호가 나왔을 것으로 추정되며 7호(1945년 12월 12일)로 종간됐다. 이번 4,5호와 함께 7호 부록으로 발간된 전체 포로들의 이름과 주소가 담긴 명단도 함께 발견됐다. 이 주소록은 한국에서도 발견돼 당국에서 보관하고 있지만 훼손되어 정확한 명단 파악이 어려웠으나 이번 목록은 2700여 명의 온전한 리스트가 담겨 있다. 또한 명단 중에는 위안부로 추정되는 50여 명의 여자 이름도 담겨 있다.

이번에 발견된 자유한인보는 '독도 화가'로 잘 알려진 권용섭(56·LA)씨가 부친이 남긴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확보했다. 부친 권임준씨는 경북 의성 출신으로 20살 때인 44년 7월 강제징용으로 끌려갔다가 오키나와에서 미군에 포로로 잡혀 하와이에 수용됐다. 권 화백에 따르면 부친은 45년 12월 26일 귀국선을 타면서 그동안 발행됐던 자유한인보를 많이 가져왔지만 나머지는 유실되고 4,5권만 남았다는 것이다. 부친은 2000년 타계했다.

자유한인보는 밀랍지에다 철필로 손글씨를 쓴 뒤 이를 등사기 롤러를 이용해 여러장 찍어내는 방식으로 만들었으며 한 호를 대략 300권 정도 찍어 돌려 읽은 것으로 전해진다. A4 크기 갱지에 한글·한문 혼용 세로쓰기로 제작되었으며 4호는 68페이지, 5호는 54페이지 분량으로 한쪽 면에만 인쇄되어 있다.

책의 구성을 보면 권두언을 시작으로 시론·논단·국제뉴스·시(신체시)·역사·수필·연재소설·퀴즈 등 시사·교양 잡지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필진은 주로 식자층이 참여한 것으로 보이며 귀국을 앞둔 설레는 마음, 귀국 후 완전한 독립국가를 되찾자는 열망, 단결을 호소하는 글, 조국의 후진적인 문명을 걱정하는 마음 등 당시 조국을 잃었다 되찾은 젊은이들의 치열한 생각이 투영되어 있다.
독립기념관 홍선표 책임연구위원은 "한인 징용포로들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사료"라면서 "이번에 4,5호가 발견됨으로써 1~7호 중 절반의 내용이 확보되는 셈이어서 학계에 귀중한 연구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홍 연구위원은 또 "자유한인보에는 일제시대를 관통하는 독립운동 및 우국지사들과 맥을 같이하는 육성이 담겨 있어 독립운동사에도 귀중한 사료로 활용가치가 높다"고 평가했다.

징용 포로한인 소식지 '자유한인보' 4·5호 독점 발굴

<1>어떤 내용이 담겼나

해방을 맞이하던 시절, 지금부터 70여년 전. 한글 고어체의 흔적이 물씬 묻어나는 한글·한문 혼용체의 잡지를 읽어본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롭다. 그런데 글을 쓴 사람들이 일제에 징용으로 끌려간 한인들이고, 그들이 미군에 포로가 되어 하와이에 수용되어 있는 상황에서 쓴 글이라면 더욱 특이한 환경과 소재가 드러나는 글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나라를 잃고, 일제에 끌려가 생사를 넘나드는 고생을 한 끝에 비록 포로가 되었지만 다시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희망을 품은 식민지 출신 젊은이들의 생각은 어땠을까. 그런 환경에서 손글씨 등사본으로 50~60페이지에 달하는 시사 교양잡지를 순전한 창작 기고문으로 매주 발간했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 최초로 발견된 '자유한인보' 4, 5호엔 어떤 내용이 담겼을까.

◇공지·주장=자유한인보는 수용됐던 2700여 명의 소식지 역할을 담당했다. 4호의 권두언은 '귀국의 즐거움'이란 제목으로 곧 조국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소식을 실었다. 당시 포로 수용소 캠프 책임자는 해롤드 K. 하월 대위(당시 대좌로 불림)였다. 이 권두언에는 '하월 대좌가 우리들 중에서 30명을 본부로 청(請)하야 우리들이 바라는 귀국일을 발표하였다'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하월 대위가 '여러분의 귀국과 거기에 속한 여러가지 문제'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성명이 실려 있다. 여기에는 2700명의 귀국 절차를 대표할 대표자를 선거를 통해 선출할 것과 12월 26일 귀국선이 떠날 것이란 내용이 들어 있다. 이 공고문에는 서로 손잡고 증오심을 버리라는 말이 나온다.

기고문에도 단결하자는 내용, 조국이 분단되려 하는데 우리가 들어가면 힘을 합쳐 막아야 한다는 내용, 힘을 길러야 한다는 주장, 이기주의를 버리자는 주장 등 우국지사적인 큰 목소리가 곳곳에 배어 있다. '우리들의 느낌'이란 제목의 무명으로 쓴 글은 '반목질시하여 오던 오해를 일소하고…격렬한 단결에 공헌하자'고 호소한다. 징용포로들 중에서도 친일 성향의 정도에 따라 내부적으로 많은 갈등과 분열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문학=전쟁의 참상 속에서 고통받고 외로웠던 심정, 그리고 고향을 절절하게 그리워하는 마음이 시와 수필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고도(孤島)에의 추억'(김병태)이란 에세이에는 '마낑도'에서 미군 공습에 시달린 나머지 어느날 밤 지붕을 오가는 고양이 소리에 누가 놀랐고, 그 소리에 공습이야, 상륙이야 하는 집단 공포가 퍼지면서 바다로 뛰어들고, 병이 깨진 곳으로 도망가다 다치는 등 아비규환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고양이 공습'의 웃지못할 추억을 소개한다. 일제 말기 새로운 시 형태로 유행한 '신체시(新體詩)' 코너도 있다. 남과 북이 갈라지면서 싸우는 바람에 통일 조국이 멀어지는 안타까운 마음을 시로 표현한 '조선'(유지석)도 눈길을 끈다.

"붉은 적삼 파란 치마/세면하고 분 발으니/순진한 시골 처녀…북쪽에서 모여들고/남방에서 찾어와서/온갖 꾀임 다해가며/서로 탐만 내누나…"
◇교양='시론' 코너 4, 5호에 '콤롬비아의 도시 개선'이란 제목의 번역 글이 실려 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 10월호에서 '씰비아 마-ㄹ틴'이란 사람의 글을 번역한 것이다. 전문을 보면 '우리가 고국으로 돌아가면 도시정리문제가 중요할 것이다. 콤롬비아의 도시 개선의 역사를 기재하여 참고할까 한다'고 쓰고 있다. 내용엔 산이 많아 계곡으로 분리되어 살고 있는 콜롬비아 국민들이 '공공향상회'란 단체를 통해 국가적인 결속과 문명의 발전을 이루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낙후된 조국의 발전을 위해 걱정한 흔적이 역력하다.

▷뉴스·시사='우리나라에 대한 미국 신문 사설'이란 제목의 글에는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이 한인은 일본인 같이 고양이처럼 살아왔다고 했는데, 이는 한인을 업신여긴 것이고 1세기간 창조한 미국의 신망을 손상시킨 것'이라고 지적한 미국 신문 사설을 소개했다. 남북 사이에 38선을 그은 것에 항의하는 중국 등 해외동포들의 시위를 전하는 소식도 담겨 있다.

◇오락=유머·퀴즈 코너도 있다. 지금으로 치면 O,X 문제인데 '조선 13도는 전부 바다를 끼고 있다' '향수 1온스를 만드려면 장미 40송이가 필요하다'에 맞다, 틀리다로 답하는 식인데 다음 호에 정답을 게재한다. 유머 코너엔 '처음보는 아들!?'이란 제목의 글도 있다. 귀국했더니 아내가 3살 짜리 모르는 아들을 키우는 걸보고 '(나)저 애는 웬 어린애요? (아내)저…저…(나)대관절 몇살이나 되었오. (아내)세살입니다. (나)오-그러면 내가 남양으로 온 지 아홉달 되어서 난 것이로군…허허허허'라고 맺는다. 가족 생이별의 슬픔이 가득 묻어나는 눈물나는 유머가 아닐 수 없다.
◇잡지를 통해서 본 포로 생활= 자유한인보에서 드러난 생활상을 보면 한인 포로들은 미군들로부터 상당히 우호적인 대우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7호 부록으로 나온 포로들의 주소록 표지에 보면 '이 주소록의 완성을 위하야 갖은 사소한 일에까지 염려해준 하월 대위와 철야의 노고를 아끼지 않은 라일 머쓴 1등병, 이 이름을 이 책과 같이 기억하고자 한다'고 써 있다. 미군이 포로들의 소식지를 발간하는 데 적극 협조했음을 알게 한다. 당시 포로들은 8명이 한 조가 되어 천막에 수용되었는데 청소, 페인트 등의 잡일을 하며 하루 8센트의 노임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대부분은 일제가 패전을 거듭하며 마구잡이 징병에 나섰던 43년부터 2년여에 걸쳐 징집된 사람들이다.

내부적으로 규율을 지키려 노력한 흔적도 보인다. '숭신사(崇新舍)에 관하여'란 글에는 '일본이 우리를 불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완전한 돼지라고 부른 것을 참을 수 없다. 불완전한 인간이 될 가능성이 있는 한인을 한곳에 모으니 그 집을 '숭신사'라 부른다'고 했다. 이곳에 질이 나쁜 200여 명을 수용해 교육시킨다는 것으로 귀국을 앞두고 포로 사회 내부에서도 극심한 혼란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포로들은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12월 26일 2600명이 1차로 귀국선에 오른다. 나머지 100여 명은 다음해 8월 귀국한다. 이번 자유한인보 4,5호를 남긴 권임준(당시 21세)은 '신재남양화진토(身在南洋化土盡, 몸은 남양에서 흙이 되었고)'로 시작되는 한시를 26일 선상에서 남기며 죽은 영혼들을 위로했다.

이원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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