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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盤上)의 향기] 일본의 절해고도에서 고균을 지켜준 건 바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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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호 26면

1894년 김옥균이 죽기 사흘 전인 3월 25일 친구 미야케에게 선물한 바둑판(왼쪽)의 덮개 안 쪽에 쓰여진 글. [사진 한국기원]

고균(古筠) 김옥균(金玉均·1851~94)이 본인방(本因坊) 슈에이(秀榮·1852~1907)를 방문했다. “이거 원, 밥상이 없어서 불편해 큰일이오. 뭔가 쓸 만한 것이 있으면 빌려 주구려.” 슈에이 선생은 “보다시피 나도 마찬가지요. 좀 깨끗지는 않지만 바둑판이 하나 여유가 있으니 이거라도 가지고 가구려”라고 말한 뒤 집안에서 유일하게 책상 구실을 하는 부목반(浮木盤)을 가리켰다. 김옥균은 아주 기뻐하며, “이거라면 때로 바둑도 둘 수 있겠다”면서 하숙집으로 가지고 갔다.
슈에이의 애제자 가리가네 준이치(雁金準一·1879~1959) 9단이 회고한 이야기다. (안영이, 『다시 쓰는 한국바둑사』. 2005, p. 89)
고균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갑신정변(甲申政變·1884)의 주역으로 3일천하 후 일본으로 망명했다. 두 번의 유배 등 험한 망명 생활을 거친 후 상하이(上海)에서 홍종우(1854~1913)에게 암살 당해 삶의 막을 내렸다.
슈에이는 누군가. 일본 도쿠가와 바쿠후(幕府) 체제가 1860년대에 끝났을 때 바둑계 4대 가문은 급격하게 가세가 기울었다. 세태는 격변했다. 바둑 같은 기예(技藝)에 눈 둘 세상은 어디에도 없었다. 본인방 가문은 두 번의 화재마저 있었던 터라 교습용 바둑판만 몇 개 남아 있을 정도였다. 가문을 상징하던 ‘부목반’이 식탁이 되는 형편이었다. 슈에이는 그런 때의 가문 적장자였다.
부목반은 일본 바둑 권위의 상징이었다. 1570년경 전국시대의 권력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1534~82)가 산을 따라 오르던 중 깊은 소(沼)에 백룡(白龍)이 산다는 말을 들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용이 아니라 폭포 아래에 큰 나무둥치가 떠다니고(浮木) 있었다. 그 나무를 가져다가 바둑판을 두 개 만들어 하나는 자신이 갖고 다른 하나는 초대 본인방 산샤(算砂·1559~1623)에게 주었다. 이 바둑판이 본인방 가문의 보물이 되었다. 권위가 되었다. 권위는 보물보다 귀하다. 18대 본인방 슈호(秀甫·1838~86)는 자신이 가문을 잇게 되자 무엇보다 먼저 부목반을 끌어안고 춤을 췄다.
하지만 바둑판으로 쓰기에는 부목반이 좋은 나무가 아니라는 설도 있다. 가리가네 9단도 “듣기로는 단단한 나무”라고 말했다. 바둑판은 무른 것이 좋다. 돌을 놓을 때 나무가 충격을 흡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손가락에 금속성 충격이 전해지지 않아야 한다. 얼굴이 곰보처럼 되어야 좋은 바둑판이라 부르는 이유다. 김옥균이 받은 부목반은 그가 죽은 후 종적이 묘연했다.

<10> 고균 김옥균과 바둑

고균(古筠) 김옥균.

돛단배로 20여일 걸리는 외딴 섬의 우정
무너지고 떠내려가는 상황에서 고균과 슈에이는 만났다. 일본 정계의 막후 실력자 도요마 미쓰루(頭山滿·1855-1944)가 바둑 모임을 열어 두 사람을 만나게 해주었다. 두 사람은 의기 투합해 곧 친형제보다 더한 사이가 되었다. 우정이 어느 정도였던가. 고균이 1886~88년 오가사와라(小笠原) 섬에 유배되었을 때엔 슈에이 홀로 찾아가 3개월이나 묵을 정도였다. 오가사와라 섬은 30여 개의 작은 화산섬으로 이뤄진 제도(諸島)로 무인도와 다르지 않았다. 1862년 일본 이주민이 불과 38명이었다. 영·미와 영토 갈등을 겪은 후 1876년에야 비로소 일본에 속하게 되었고 1880년에 도쿄 관할이 되었다.
슈코마루(秀鄕丸) 호를 타고 21일 후 도착한 섬에서의 유배 생활은 형벌이었다. 일본에서 태평양 방향으로 1100km 떨어진 곳. 연평균 기온 22.6도. 비 내리는 날은 연중 190여 일을 넘었다. 아열대 지역으로 건강에 매우 나쁜 환경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피부가 곱고 희다 하여 이름을 옥균(玉均)이라 했던 고균.
움막에서 밥을 지어 먹었다. 망망대해, 돌아봐도 망망대해. 시간이 지나면서 섬 아이들에게 바둑도 가르치고 서예도 가르쳤다. 뒷날 상하이에서 죽던 날까지 고균을 돕던 와다 엔지로(和田延次郞)는 섬에서 만난 9살 소년이었다. 그런 섬에 20여 일 돛단배를 타고 슈에이는 고균을 찾아갔다. 안도요지(安藤豊次)가 쓴 『좌은담총(坐隱談叢)』(1904) 제2권 ‘본인방 슈에이’ 편에 글이 하나 있다. 고균이 슈에이와 헤어질 때 써준 글이다.

본인방 슈에이는 내 스승이요 벗이다. 바둑의 스승일 뿐만 아니라 의(義)에 있어 벗이다. (本因坊秀榮君我師也我友也非獨碁道之師焉以義而友焉)
병술년(1880) 가을 남해 오가사와라 섬에 버려져 절해고도의 생활이 비할 바가 없을 정도로 괴롭다는 것은 세상 사람이 다 아는 바다. (余于丙戌秋被逐南海小笠原島其箙寄孤絶幾無與比世人亦共知也)
(注: 책에는 比가 此로 되어 있었다. ‘箙’은 있다면 말이 잘 안 된다.)
이듬해 정해년 봄 군(君)이 문득 이곳에 왔다. 내 홀로 궁벽한 섬에 있음을 염려한 탓이다. (其翌年丁亥春君忽至焉爲念我孤寄窮島也)
그 남다른 의기를 어찌 나만 느끼겠는가. 3개월을 머물렀다. (其出人氣義豈獨在我而有感而已哉爲留三個月)
(注: 책에는 人을 入으로 썼다.)
있는 곳이 난산(亂山) 속이라 종일 사람을 볼 수 없었다. 날마다 흙을 옮기고 풀을 베어 아담한 정원을 하나 만들었으니 이는 군과 나의 소일거리였다. (余之所寓在于亂山中於日無人見每日只事搬土鋤草小築一庭園卽君與吾消笑法)
이제 초여름에 배가 다시 왔고 군이 경(京)에 돌아가려 하니, 이에 글 써두어 장차 손잡고 웃을 일 하나 만들어두노라. (夏初船至君將歸京爲書以贈留作異日幄手一笑之資)
의(義)란 무엇인가. 불우할 때의 정(情)이다. 뒷날 이 섬에는 유길준(1856~1914)도 1년 정도 유배를 왔다. 어디선가 이런 글 읽었다. 유길준이 고균이 만든 정원에서 고균을 생각해 쓴 글이 『구당시초(矩堂詩鈔)』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정원의 화초는 주인 떠난 줄도 모르고 푸르기만 하구나. 그 시절 봄인 듯. (庭草不知人已去 靑靑猶似舊時春)”

기보 슈에이(백)와 고균의 대국보.

바둑판에 남긴 글에선 단아한 기품
고균은 빈민에게 지급하는 구휼금(救恤金)으로 생활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방탕한 생활로도 유명했다. 돈은 있으면 있는 대로 썼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았다. 여자도 많아 적어도 7명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 파격(破格)과 솔직 담백한 성품에 극한에 몰린 신세였으니 당연하다 해도 된다. 후원자도 있었고 실망과 반목도 있었다.
하지만 단아한 인품도 갖추었으리라 짐작된다. 글의 품격도 그렇지만 바둑도 그렇다. 슈에이와 고균의 대국보(작은 사진)를 보자. 1886년 2월 20일에 둔 것으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기보다. 칫수는 6점. 흑1~3은 공격과 수비를 겸한 깔끔한 수법. 흑9~15는 전국적 균형을 유지하는 맑은 대국관. 요즘으로 치면 강한 1급 수준이다.
정계의 사변이야 무상한 것이고 삶도 그러하지만 품격은 남는다. 사진을 보자. 바둑판 덮개 안쪽에 남은 고균의 글씨다. 고균은 덮개에 이 글을 쓰고 나서 사흘 후 죽었다.

이 바둑판은 내가 전에 무라키조의 바둑판 가게에서 구입했다. (此局余曾從村木町棋局店購得)
처음 봤을 땐 때 묻고 흠결 있어 가치가 별로 없었다. (初見黦黑歪缺價値爲瓦礫)
집에 돌아와 깎고 새롭게 다듬고 나니(歸而剗新之)
비록 극상품은 아닐지라도 중등의 가장 좋은 품질인 것은 분명하다. 틀림없다. (雖不入極佳材其爲中等之最佳品明矣)
내 벗 미야케(三宅)에게 주어 문방의 상서롭고 좋은 일로 삼게 한다. (遂留贈三宅我友用爲文房中吉羊善事)
갑오년 2월 고균이, 훌쩍 떠나면서 쓰다. (甲午仲春日古筠 頭陀志)

곤궁 속에도 갑신년의 희망 잃지 않아
고균은 실력자 도요마의 돈으로 3년여 동안 도쿄 유라쿠초(有樂町)에서 흥청망청 방탕한 생활도 했다. 빈민 같은 삶도 살았다. 유배와 바둑과 술이 이어졌다. 그래저래 일본에서 10년을 살았다. 그리곤 상하이에서 죽었다. 혁명가로선 실패한 삶이었을까.
그에 대해 역사 해석은 대체로 하나인 듯하다. 1894년 암살로 그는 실패한 인물로 끝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의문이다. 고균은 방탕한 생활 속에서도 뜻은 넓게 가졌으며, 곤궁 속에서도 갑신년의 희망을 잃지 않았다. 청나라 정치가 이홍장(李鴻章·1823~1901)을 만나러 위험을 무릅쓰고 상하이로 떠나는 결단을 내린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바다.
고균의 죽음을 역사적 사실(事實)로만 바라본다면 아쉬움이 남는다. 역사적 주술(呪術)로 작용하여 사실(史實)로 남게 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고균이 죽게됨으로써 갑신정변이 비로소 역사적 의미를 ‘풍성하게’ 갖게 되었다는, 그것.
삶과 죽음·의미·역사. 이 모든 것은 신(神)과 통한다. 우리가 신에게 접근하는 방식 중 하나는 공물(供物)이다. 신과 인간은 별개의 존재. 만날 필요가 있다. 두 존재를 하나의 연속선 위에 놓이게 하는 방식, 그것이 공물이다. 제사가 그런 것이고, 십자가의 숙명이 그렇다. 공물을 통해서 비로소 인간은 신과 접속한다. 신과의 접속 없이 역사적 의미를 구하는 건 쉽지 않다.
접속 다음에는 어찌 하는가. 공물 희생(犧牲) 의식을 치른다. 신은 이제 인간에게 책임을 갖게 된다. 그것이 은총. 인간은 신에게 권리를 가진다. 신에 대한 권리 중에서 큰 것은 역사에 대한 희망. 사실(事實)이 사실(史實)이 되는 순간이다. 고균의 죽음으로 갑신년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변한 이유다. 갑신정변엔 고균 외에도 박영효·홍영식·서재필·서광범 등 주역이 많았음에도 고균이 곧 정변의 이미지로 남은 배경이다.
그런 길을 고균은 떠났다. 슈에이와의 재회야 언제 다시 기약하리.



문용직 서강대 영문학과 졸업. 한국기원 전문기사 5단. 1983년 전문기사 입단. 88년 제3기 프로 신왕전에서 우승, 제5기 박카스배에서 준우승했다. 94년 서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바둑의 발견』 『주역의 발견』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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