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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명 이상의 범죄실행 합의 입증돼야 음모죄 성립"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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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통합진보당 이석기(오른쪽 첫번째) 의원에 대한 내란음모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에 앞서 이 의원이 미소 짓고 있다. 이날 이 의원은 내란음모 혐의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았다. [뉴시스]

음모(陰謀·conspiracy)라는 단어에서 사람들은 대개 음험하고 거대한 집단의 획책을 떠올린다. 거대권력이나 특정집단이 대다수 시민을 기망하는 상황을 연상하기도 한다. 이는 ‘음모이론(Conspiracy Theory)’과의 혼동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2000년 사회문화연구소가 펴낸 『사회학 사전』은 음모이론을 이렇게 정의했다.

 ‘원치 않는 사회적 결과가 집단의 행위로부터 발생한다고 믿는 신념체계. 음모이론에서 행해진 주장에 진실의 요소가 있든 없든 그것은 주장의 본질을 과장하고 종종 빈약한 증거를 확대한다….’

 케네디 대통령과 존 레넌 암살의 배후가 있다거나, 미국 정부가 외계인의 존재를 감추고 있다는 ‘로스웰’ 사건이 대표적인 음모이론이다.

 서울고법이 지난 11일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등 이른바 RO(Revolution Organization)의 내란음모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면서 ‘음모죄’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음모이론과의 혼동에서 벗어나면 사전적 의미와 법률적 의미의 음모가 남는다. 물론 이석기 사건의 쟁점은 법률적 의미에서의 음모다.

근대법 원칙 “생각만으론 처벌 못해”

형법(刑法)의 원칙상 음모는 처벌할 수 없는 범죄다. 로마 법학자 울피아누스가 말했듯 ‘누구든 생각만으로 처벌되지 아니한다(Cogitationis poenam nemo pacitur)’는 게 근대법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 범죄, 즉 실행됐을 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히는 경우에 한해 각국은 예외적으로 실행되지 않은 범죄도 처벌한다. 바로 음모죄다.

 미국은 형법상 음모죄를 인정하는 대표적인 나라다. 연방법(US Federal Law)에 중요 범죄에 대한 음모죄를 규정하고 있다. 테러나 마약범죄, 마피아와 같은 조직범죄, 기업범죄 등이 포함된다. 예외적 처벌인 만큼 음모죄를 적용하는 데에는 엄격한 원칙을 세워놓고 있다.

 2010년 미 의회조사국(CRS)이 펴낸 ‘연방음모법(Federal Conspiracy Law)’ 보고서에 따르면 음모죄의 구성 요건은 크게 세 가지의 원칙을 만족시켜야 한다. ▶2명 또는 그 이상의 참여가 있어야 하고 ▶이들 사이의 합의(agreement)가 있어야 하며 ▶범죄를 실행하려는 명백한 행동(overt act)이 특정돼야 한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1946년 ‘핑커튼 형제 대 미합중국 사건’ 판결 이후 음모죄에 대한 원칙을 바꾸지 않았다. 이른바 ‘핑커튼 법칙(Pinkerton Rule)’. 이 원칙에 따르면 두 사람이 범죄행위에 합의했다면 범행을 실행한 사람의 혐의를 합의자에게 함께 적용할 수 있다.

 이 같은 원칙은 종종 미국 검찰에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돼 왔다. 연방대법원이 이 판례를 고수하는 것은 조직범죄의 소탕을 위해서였다. 직접 범죄를 실행한 사람 외에도 이를 사주하거나 가담한 범죄단체 조직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범죄에 합의했다는 이유만으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까지 처벌한다는 점에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류영욱 미국변호사는 “미국에서도 음모죄 사건의 경우 실제로 음모자들이 범죄에 합의했는지를 입증하는 것은 늘 어려운 문제”라며 “실제로 은행강도 음모혐의로 기소된 러시아 이민자가 영어를 잘 하지 못해 범죄모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단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은 판례도 있다”고 말했다.

대법원 판례, “실질적 위험 인정돼야”

RO사건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고법 제9형사부(재판장 이민걸)는 왜 1심이 인정한 내란음모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을까.

 법체계가 다르긴 하지만 재판부 역시 미국 음모죄의 구성 요건 원칙을 그대로 따랐다. ‘음모의 합의’가 이뤄졌다고 단정할 만큼 명백한 입증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들은 내란음모죄의 구성 요건인 ‘내란범죄 실행의 합의’를 하는 단계에까지 이르지 못했다”고 밝혔다.

 판결문에는 이 같은 판단을 내리기까지의 과정이 구체적으로 적시돼 있다.

 ①5월 12일 회합에서 피고인(이석기)의 질문에 대해 참석자들이 “네”라고 답했거나 박수로 호응한 것만으로 범죄실행에 합의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agreement)

 ②회합 후 여러 차례 소모임에서 실행에 대한 추가 논의를 했다거나 준비행위를 했다고 볼 증거가 없다.(overt act)

 ③내란행위를 구성하는 개별적인 범죄행위까지 세부적으로 특정하여 합의할 필요는 없으나 주요한 부분, 즉 시기·대상·수단 및 방법·실행 또는 준비에 관한 역할분담 등의 어느 것도 윤곽이 특정됐다고 볼 수 없다.(overt act)

 ④따라서 객관적으로 보아 내란범죄의 실행을 위한 준비행위라는 것이 명백히 인식된다거나 그 합의에 실질적인 위험성이 인정된다고 볼 수 없다.

 재판부는 논거④를 통해 미국 연방대법원이 제시하고 있는 음모죄의 구성 요건 외에 우리 대법원의 판례를 통해 인정되고 있는 원칙 하나를 더 적용한다. 이른바 ‘실질적 위험성’의 원칙이다.

 99년 대법원이 강도음모죄로 기소된 피고인들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판결(99도3801)로 사법시험에도 출제될 만큼 유명한 판례다. 당시 군인 신분이던 두 피고인은 ‘총을 훔쳐 전역 후 은행이나 현금수송차량을 털어 한탕하자’는 말을 나눈 사실이 인정돼 강도음모죄로 기소됐다. 하지만 대법원은 “형법상 음모죄가 성립하려면… 단순히 범죄결심을 외부에 표시·전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합의에 실질적인 위험성이 인정될 때에 비로소 성립한다고 할 것이다”며 무죄 확정 판결을 내렸다.

 RO사건에서 음모죄가 유죄판결을 받으려면 ▶회합 참석자들이 내란범죄를 실행하는 데 합의했음을 입증할 수 있는 발언이 있어야 하고(agreement) ▶KT 혜화지사나 평택 LNG기지 등 국가기간시설을 언제, 어떻게 타격하겠다는 내용이 특정돼야 하며(overt act) ▶이를 종합해 이들의 합의가 실질적 위험이 된다고 판단할 만한 내용이 공소사실에 포함됐어야 한다는 얘기다.

“음모죄 유형별 구체화 등 개선 필요”

우리 형법의 음모죄는 총칙(總則)에는 규정돼 있지 않다. 다만 특정 범죄를 다룬 각칙(各則)의 일부 범죄에 대해 예비죄(범죄를 저지르진 않았지만 물적 준비를 한 경우)와 함께 처벌규정이 있다. 예비·음모죄가 규정돼 있는 범죄로는 RO사건에 적용된 내란죄 외에도 살인·강도·현주건조물방화·음용수사용방해·통화위조·외국에 대한 사전(私戰) 등이 있다. 모두 실행된 이후에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히는 중범죄에 해당한다.

 우리 형법의 음모죄 조문이 너무 모호하다는 주장은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

 우리 형법 조문은 ‘~한 범죄를 범할 목적으로 예비·음모한 자는 ~에 처한다’라고만 돼 있다. 실행되지 않은 범죄인 점은 같지만 물적 준비를 하는 단계인 예비죄와 말로 합의하는 단계인 음모죄를 구분하지 않고 있다. 구체적 실행행위를 규정하고 있지 않아 범죄의 대상과 처벌범위를 명확히 해야 하는 죄형법정주의에 어긋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박강우 충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음모죄에 대해 유형별로 구체화하고 예비죄와 음모죄를 구별하는 등 현행 형법에 대해 입법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예비죄와 음모죄가 구별되지 않고, 심지어 선동죄까지 세 범죄의 법정형도 같은데 각 죄의 불법성의 정도가 같은지에 대해 논란이 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동현 기자 offram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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