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7)제72화 비관격의 떠돌이 인생-김소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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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아버님을 여의고>
10수년 전의 묵은 책이기는 하나 내게「자전 에세이」1권이 있다. 유년기부터 해방까지 내가 거쳐온 노정이 대충은 거기 적혀있지만, 물론 부수로는 이 글이 실리는 중앙일보의 1백분의 l이 채못된다. 그렇다고는 하나 이미 한번 쓴 얘기들을 다시 들춘다는 것은 그 책을 읽어준 독자에게 미안할 뿐더러 쓰는 사람으로서도 별로 탐탁스러운 노릇이 못된다.
일본과 당국 사이-그 얽히고 실긴 민족감점의 틈바구니에서 용케도 70여년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일본과 관련을 가졌다는 그 이유 하나로 나를 이완용의 사촌쯤으로 판단하고 규정지으려 드는 그런 소식불통의 벽창호들도 수두룩했다. 거기 지불한 세금-, 내 젊은 시절의 정신적「에너지」의 80%는 이유없는 그 세금으로 해서 소모되었다고 보아도 과장은 아닐 것 같다.
이제 와서는 나이 덕을 보는 탓인지 내 귓전에서 웽웽거리던 그런 땅벌들도 잠잠해졌다. 가끔은 회한한 전화를 걸어오는 애국자(?)도 한둘은 있지만, 그만한 자극도 없어지면 아마 살맛이 없어지리라.
그보다도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지기들의 과분한 우의-,글이나 말로 표현할 노릇은 못되지만 연말「보너스」를 1년 앞당겨 받는 것 같은 미안함과 고마움을 감당할 도리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분수에 넘치는 배당같다.
이 글에서는 직접 간접으로 일본과 관련있는 이야기에 중점을 둘 생각이지만 그러자니 자연 어린 시절을 들추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내가 태어난 곳은 부산 영도(그 당시의 절영도)요, 두 살 때 선친을 여윈 곳은 진주-. 그 뒤 부산으로 다시 왔다가 진해로, 김해로. 또 한번 부산으로- 이렇게 전전하기를 13세까지 했다. 일본과의 숙연은 내가 석탄 배에 실려 일본으로 건너간 13세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태어날 때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운명의 실꾸리가 풀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내 선친은 구 한국 도지부(탁지부 I현 재무부)의 소장관리였다. 인물이 귀했던 시절이기도 해서 대신들 사이에 꽤나 신임이 두터웠다고 한다. 어느 대신은 오래간만에 찾아간 선친을 버선발로 뛰어 나와 손을 잡고 맞았다는 부설(?)이 있다. 이런 전설은 어느 집 가문에도 있게 마련이지만 1년을 두고도 두 세차례씩 승진한 선친의 임관 사령상으로 미루어 한갓 전설만은 아닌 성 싶다.
일찌기 세상을 뜨는 이가 대개 그런 법으로, 선친도 건실 충직해서 남들의 칭송이 대단했다고 한다. 이 역시 전실만이 아닌 증거로는, 내 어린 시절 외가댁 조모님이 나를 두고「범이 개를 낳았다」고 놀렸던 것으로 보아 짐작이 간다.
그토록 촉망이 두터웠던 선친이 하룻밤 새, 동포의 총알에 쓰려져 30이 채 못된 젊은 목숨을 잃었다.
명목만은 독립국가이면서 국가 재정의 실권이 일본인의 손아귀에 있었고, 대구에는 일본인「가와까미·시로」(천상사낭)가 국장인 재무 감독국이 있었다(영남지방을 관할하는 지방국이 아니었던가 싶다). 도지부의 재무관리가 일본인과의 접촉없이 직책을 수행 못했을 것은 당연한 이치련만 군대 해산 이후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은 그것 저것을 가릴 나위 없이 일본인과 접촉하는 관리는 모조리 친일파로 몰아 버렸던 것이다.
내 선친도 그러한 격동기의 희생자의 하나였다(정작 선친은 귀성 때마다 향리의 청년들 앞에 국난을 호소하며, 밤이 깊도록 자작의 애국가룰 가르쳤다고, 이것은 숙부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다).
선친은 임지이던 진주에서 돌아가셨다. 부산 절영도에서 동장으로 계시던 조부님은 선친의 장사가 끝난 뒤에도 조모님과 같이 두 달을 진주에 그냥 머무르셨다.
스물 둘에 과수가 된 어머니와 조부모님 사이에 물욕으로 해서 생겨진 갈등-, 가매장한 무덤의 흙이 채 마르기도 건에 날이면 날마다 시어머니·며느리가 차례로 번갈아 가면서 그 무덤 앞에 엎드려 선친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고 호소하는 것이 일과였다고 한다.
두 달 동안 자리를 비왔던 새 동장 인을 맡겼던 문모라는 동 서기가 영도 섬을 통째로 일본인「시마·도꾸조」(도덕장)에게 팔아 넘기고 종적을 감추었다. 동장인 책임으로 조부님은 가산 전지를 모조리 정리해서 뒷수습을 하고 보니 찹쌀 여섯 가마가 겨우 남았더란 얘기다.
일족 10여명이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조부님의 어투로는「죽으려고」-노일전 때 일본이 기지로 쓴 진해군항으로 유리해갔다.
머슴 등에 업혀서 비를 노 맞으며 육로로 부산을 떠나던 그날, 10여명 가족들이 황토 빛 탁류에 발을 적시며 앞서거니 뒤서거니「집시」처럼 낮선 타향 길을 찾아가던 그날의 기억-, 내 눈에 비친 인생풍경은 것 대문부터 이렇게도 구슬프고 처량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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