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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루스의 비행-강능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때·현대
곳·조민기의 방
나오는 사람·조민기 김한수
무대는 전체적으로 짜임새 있는 인상을 준다. 무대 중앙에는 엉성하게 두드려 맞춘 듯한 탁자와 등받이 없는 의자 두개가 있다. 무대 오른쪽에는 출입구가 있고, 전면으로는 책상과 등받이 의자, 책상 위에는 찢어진「캔버스」가 몇개 놓여 있다. 무대 왼쪽으로는 낡은 침대가 퇴색된 하얀 무명 천으로 덮여 있는데 그 위에 검정「잉크」가 여기 저기 뿌려져 있다. 그 위쪽 벽에「비닐」로 막은 조그만 창문이 있다. 누군가가 이 방안에서 은거 생활을 하는 듯한 인상을 주며 싸늘한 고독이 스며있는 느낌을 준다.
무대에 불이 들어오면 객석 정면을 향해 앉은 김한수가 종이쪽지에 적힌 글을 무심히 읽고 있다. 김한수가 앉아 있는 탁자 주위만 환할 뿐 나머지 부분은 모두 어둡다. 이윽고 김한수는 읽고 있던 종이 쪽지를 접어서 봉투에 집어넣고는 객석 정면을 향한다.

<1장>
김한수(봉투를 가볍게 짚으며)이 봉투 안에 적힌 글은 나의 친구 조민기가 자살할 때 남겨 놓은, 말하자면 그의 유서가 되는 셈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짤막하게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네 영혼을 태우고 날개 달린 천사를 만나기 위해 하늘나라로 향하는 이 요술 담요 테두리에 예쁜 금박 액자를 둘러서 아늑한 내방 침대 벽 쪽에 걸어주십시오.』
나의 친구 조민기는 일주일전에 20층이 넘는「빌딩」옥상에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뛰어내렸습니다.
그는「빌딩」앞 쪽에 자기가 미리 깔아놓은 널따란 하얀색 무명 천 위로 떨어졌습니다. 흰색의 무명천은 붉은 선혈로 범벅이 되었고 온몸 골절의 마디마디가 모두 부러졌는지 그의 사지는 소리 없이 흐물 거리는 듯 보였습니다.
하늘은 맑게 개서 회한과 추억을 땅으로 툭툭 털어 버렸다는 듯이 저만큼에서 무심히 서 있었습니다. 붉은 태양은 피에 물들지 않은 무명천의 하얀 부분에 내리쬐어서 반짝반짝 빛나게 했습니다. 한순간 모든 세계는 정지됐고 사방은 무거운 고요와 침묵 속으로 빠져 들어가서 사람들의 어깨를 짓눌렀습니다. 차라리 아름다울이만큼 처참한 그 광경에 나는 그만 눈을 감았습니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장례식이다 끝나고 이 방에 다시 돌아와 있는 나를 발견하고 나서였습니다. 콧날이 오똑하고 긴 머리를 언제나 곱게 벗어 올린 어여쁜 얼굴의 그의 부인은 아직도 그의 자살에 관해서 의아해 하고 있습니다. 장례식 때 내가 부인의 어깨에 손을 짚으며 무언가 위로의 말을 생각하려고 애쓰고 있는데, 그 부인은 내게 힐끗 웃어 보이고는 얼굴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고통을 참고 견디는 순진한 어린아이의 안스러움이 서려 있었습니다. 나는 내 친구 조민기가 살았던 이 방 구석구석을 살펴보았습니다만 아직도 꽤 그가 자살을 했는지 이유를 모르고 있는 형편입니다.
한달 전 내가 여기 저기 수소문 끝에 조민기가 살고 있는 여기 이 방을 찾아왔을 때 그는 날 의의로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무척 초췌해 보이리라고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그의 모습은 혈기에 넘쳐있었습니다.
그러나 순간순간 스쳐 가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모습의 그는 갑자기 광분하 듯이 두서없이 무슨 말인가를 내뱉곤 했습니다.
문안에 들어서서 멋적게 서있는 나를 뒤로하고 그는 친구 새가 날아왔으니「파티」를 해야겠다면서 술을 사러 급히 나갔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새라고 불렀습니다. 예를 들면 친구 새, 애인 새, 부인 새 등등. 그런데 유독 천사 새만은 입술을 이상하게 삐죽 내밀며 반농조의 어리광을 섞어서「전사 쉐」하고 불렀습니다.
(갑자기 무대 전체가 밝아지고 문이 덜컥 열리며 뭔가를 잔뜩 담은 누런 종이봉투를 한아름 안은 조민기가 헐떡거리며 들어온다. 건강한 체구에 수염이 덥수룩하게 났다)
조민기(껄껄 웃으며) 오래 기다렸나?
김한수 아니, 별로.
조민기 그래, 오래 기다리진 않았을거야, 바람 타고 다녀왔으니까(봉지를 탁자 위에 놓고 그 속에서 소주병을 꺼낸다)자! 우리 어진 새의 상봉을 축하하면서 한 잔 하자구(김한수의 손에 잔을 쥐어주고 술을 따른다) 자! 한 잔 하지!
김한수 (따라 웃으며) 그래! (서로 잔을 부딪치고 한숨에 벌컥 잔을 비운다. 조민기의 잔에 술을 따르며) 그래, 그동안 어떻게….
조민기(말을 막으며) 잠깐! 오늘 난 자네가 취하는 것을 보고 싶어. 아니, 취해야만 돼. 그래서 내가 만취된 자네를 등에 업고 어둠이 내린 거리를 돌아다니고 싶단 말이야.(봉지를 뒤적이며 두서없이 소주와 맥주를 대여섯병 꺼내서 마구 뚜껑을 딴다. 그리고 사과를 꺼내면서) 사과! 안주로는 사과가 최고야, 난 사과를 제일 좋아해. 때로는 밥 대신으로도 먹는단 말이야. 영양가도 있고 냄새도 그만이고.
자! 자네도 한 알 먹게. (사과를 김한수에게 내밀며) 자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찾아왔나?
김한수 냄새를 맡고.
조민기 냄새? 아니 내 몸에서 지독한 지분 냄새라도 풍기나? 이 사람 제법 옛날 농담 실력이 나오는데? 좋아, 그런데 이 방과 나의 모든 것이 신비스럽다고 느껴지지 않나?(탁자 위에 놓여져 있던 봉투를 집으며)자네 이 속에 쓴 글을 훔쳐보진 않았겠지?
김한수 아니?
조민기 이 속에 기가 막힌 편지를 써 놓았지. 나의 천사쉐한테 부치는 글이야. 나의 한숨과 눈물과 기쁨을, 심연의 나락 속에 빠진 고통을, 아니, 소름끼치는 쾌감을, 나에게 마지막 남은 진실을 적어놓았지. 그런데 우체부가 오지 않아서 아직 못 부치고 있어. 더러운 양철조가리 속에 집어넣어서는 이 편지는 십리도 못 가서 병이 나고 말아.<계속> 그림·김영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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