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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마을 64가구가 모두 「신안 주씨」-동성동본 최대마을 홍성군 운곡마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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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꼬끼오-.』
신유년 첫 닭 울음이 새아침을 밝힌다.
『종손댁 수탉 울음이 한껏 청아하니 금년 농사는 풍년이겄네.』 충남 홍성군 홍동면 운월리 운곡 마을. 뺑둘러 돌아봐도 주저리주저리 「주서방」뿐인 주씨 집성촌. 한마을 64가구 모두가 주자 후손인 신안 주씨. 이른바 「주씨네 못자리 판」이다.

<15대조 홍성 정착>
전국의 동성동본 마을로는 충남 홍성군 은하면 학산리 「밀양 박씨」(30가구), 경북 성주군 선남면 문방리 「성산 이씨」(56가구),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왕계1리 「청주 한씨」(38가구). 충북 괴산군 도안면 화성리 「곡산 연씨」(39가구) 등 10여 곳이 있지만 타성이 한명도 섞여 살지 않는 동성마을의 역사로는 이곳이 전국 최고다.
주씨 마을의 역사는 무려 4백여년. 지금껏 한번도 흩어지거나 갈라서는 일없이 자손대대 똘똘 뭉쳐 살아왔다. 종손인 영탁씨(56)의 15대조 윤창이 4백여년전 홍성에 정착하면서 생겨난 이 마을엔 지금은 정-병-노-정-탁-락의 돌림자로 6대 4백50여명이 살고있다.

<사당에 주자 모셔>
그 위에서 갈라진 친척은 인근 창정·개월·상반월에 90여 가구.
웃어른 모시는 예의범절이나 상·혼례의 절도, 내외간 엄격함이 옛날 법도 그대로다.
주자를 모신 사당 창주사의 새해 제례풍경-. 자손들이 부복한 앞에서 장로격인 영탁씨가 분향한다. 유건쓰고 도포입고 행전친 모습이 고유의 제관차림이다.
『세상이 개화됐다해도 우리네 전통과 풍습을 버릴 수가 없읍니다. 주민 모두가 양반고을이란 긍지를 잃지 않고 있읍니다』. 이장득 노씨(61)는 형제·숙질간의 노름이나 싸움질은 파문의 벌을 내리고 배움이 게으르고 일에 꾀를 부리는 젊은이는 지금도 목침 위에서 종아리를 맞을 만큼 생활의 법도가 엄하다고 했다. 모르긴 하지만 법도 엄하기도 전국 최고가 될만하다.

<송사·도둑 없어>
동네엔 숫제 술파는 가게도 없다. 타관손님에겐 『마시고 싶은 분은 갖고 오시라』고 알려줄 정도. 끼리끼리 모여 살다보면 시기도 많고 말도 많겠지만 도둑 없고 싸움 없기로도 전국제일이다.
이웃간에 울타리 하나 없이 살아가지만 된장 한 그릇, 낟알 하나 없어지는 일없고 친척간에 재산 문제로 송사 난일 없는 것을 주민들은 자랑스러워한다.
『무사무욕으로 상부상조하고 중용의 도를 중히 여긴 것이 4백년의 마을역사를 지탱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종노씨(62) 는 넉넉하진 못해도 이웃이 다툼 없이 오순도순 살아온 게 바로 유교사상 때문이라고 했다.
생산활동이라면 논농사와 연초재배가 전부. 가구 당 20마지기 정도로 양식 걱정은 없다. 용수(용수)가 없고 교통이 불편하다보니 새마을공장 하나도 없다. 겨우내 부업은 남자들의 새끼꼬는 일, 여자의 삼베짜기가 고작.
그러나 예부터 『땅은 제일 정직하다』고 믿어온 이곳 주씨들은 땀 흘린 만큼 수확을 거두고 술 안 마시고 노름 안 하는 건실한 생활로 궁하지 않은 살림을 하고 있다.
가구 당 연간 소득은 2백만원. 전체 64가구 중 TV소유가 50여 가구, 냉장고는 30여 가구가 갖고있다.
도시의 상혼을 갖고 들어왔던 타성 사람들이 번번이 손을 들고 말았다. 동네 어귀에 양장점을 냈던 「김씨」, 미장원을 차렸던 다른 「김」씨가 1년도 못돼 떠나버렸다.

<타성 사람 못 견뎌>
전통마을은 나름대로 고민을 안고 있다. 세대 차에서 오는 가치판단의 갈등과 비능률적·비경제적인 의식절차가 그것.
삭망의 분향이나 3, 9월의 정일 제향 때는 전국 유림이 모일만큼 제사예법은 전국의 기준. 그러나 주씨 중에도 지나친 번거로움에 회의를 갖고 있다.
『산월 시향(시정)때면 초·중·하순 세번을 지내는데 웃대 할아버지부터 죽 내려오자면 하루 2대조씩 보통 20일이 걸리지요.』 마을 대부격인 정정씨(55)는 바쁜 추수기 한 달을 꼬박 시제에 매달려야 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했다.
경비도 엄청나 소·돼지·닭고기와 각종 해물·햇과일·포·전·식혜 등 격식대로 차리면 상 하나에 논 3마지기가 든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마을 조상 사당을 짓고 온 동네 위패를 모시고 합동제례를 지내자고 하지만 아직 옹고집 노인들에게 밀려 빛을 못보고 있단다.
TV연속극에서 신혼부부나 젊은 남녀의 「러브·신」이라도 나오면 뒷전에 앉았던 며느리나 딸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한다.
여자 나이 25세가 넘도록 시집을 못 가면 아예 퇴물로 치고 오빠·언니를 앞질러 시집·장가가는 역혼은 금물.

<평균연령 45세>
『고유의 미풍양속을 지켜 나가는 것은 좋지만 보수의 장벽을 너무 치다보니 마을 위해 일하겠다는 젊은이가 거의 없어요. 모두 도회지로 빠져나가고 늙은이들만 남지요.』 갑노씨(52)는 주민평균 연령이·45세라면서 분수에 맞는 새바람이 불어야 마을이 번성하겠다고 했다.
잘 입고 잘 먹는 것보단 배움이 깊어야 한다는 어른들 말씀을 따라 문맹자는 한 명도 없다. 국민학교 입학 전부터 한문을 익혀 웬만한 시구도 척척 풀이한다.
노익장 상노씨(68)는 『형노는 홍성에 학교를 세웠고 정빈이는 의학박사로 서울병원장이고, 얼마전엔 광희가 고시합격을 했지』라며 일가의 출세를 자랑한다.
앞산의 매(응봉)와 뒷산의 호랑이(호복산)가 호위하는 전통 보수마을은 현대화의 물결에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고집스런 옛것에 때묻지 않은 「현대」의 조화가 운곡 마을의 새해숙제다. <홍성=고정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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